교양 문화

한국생활 50년 일대기 ‘치즈로 만든 무지개’ 펴낸 지정환 신부│冊과 人

리차드 강 2009. 4. 14. 14:16

“행복해하지 않는 한국인들…내가 실패한 것 아니여?”

     

» 한국생활 50년 일대기 ‘치즈로 만든 무지개’ 펴낸 지정환 신부 (사진 명인문화사 제공)

“난 그냥 촌놈이여. 일하느라 다른 데 갈 시간도 없어. 촌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며 살고 있다고. 서울은 1년에 한 번 정도 가나. 올해엔 지난 6월 초 호암상 받느라 갔다 왔지.”
“처음엔 사람들이 내 얼굴 보고 치즈를 샀지. 그런데 지금은 ‘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아! 그 분.’ 이런 식이야. 지금은 도리어 치즈 덕에 내가 유명해졌어.”

지정환 신부. 본명은 디디에 세스테벤스. 벨기에 브뤼셀에서 1931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77살. 1958년 천주교(가톨릭) ‘전교협조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전쟁 겪고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했던 한국에 가기고 마음먹고 1959년 한 달 이상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전주교구 소속. 전주 정동성당 보좌신부로 있다가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갔다. “그때 한국하고 지금 한국은 완전히 다른 두 나라여. 비교가 안돼. 한국전쟁 때 포장도로는 서울-인천 도로뿐이었다잖아. 내가 온 1959년에도 전북 전체에 개인 자가용은 하나도 없었어. 도지사나 천주교 주교 차는 있었지만 개인차는 아니었지. 라디오도 없었어. 시골마을에 라디오 한 대 있으면 다 전깃줄로 연결해서 각 집에 스피커를 달았지.”

가난에 찌든 부안에서 100정보(1정보는 3천평)의 간척지를 개간해 동참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고리대와 노름 빚에 그 땅들이 다 넘어가는 걸 보고 “다시는 한국인들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나 1964년 척박한 산골 임실로 발령받은 그는 신용협동조합을 이끌었다. ‘(지천에 깔린) 풀과 (일없어 빈둥거리는) 시간’밖에 없던 ‘천형’같은 악조건을 산양 키우기에 호조건인 ‘천혜’의 땅으로 바꾸려 했고 마침내 그 연장에서 임실을 한국치즈의 출발점이자 본고장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실패를 거듭한 파란곡절, 벨기에와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치즈제조 비법을 찾아헤맨 끝에 마침내 해냈다. ‘정환치즈’, ‘지정환치즈’ 등 그의 이미지를 새긴 치즈들은 초기 낯설었던 한국치즈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키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지금은 임실치즈를 만드는 곳이 큰 공장 4곳(지점이 150개나 되는 곳도 있다)을 포함해 모두 12곳이나 된다. 그들은 값싸고 질좋은 외국산 수입치즈들의 홍수 속에서도 품질로 경쟁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치즈공장의 성공이 아니라 임실 주민들의 새로운 삶”이었다. 고동희·박선영씨가 쓴 <치즈로 만든 무지개- 지정환 신부의 아름다운 도전>(명인문화사)에 담긴 얘기들이다.

29살 때 벨기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찾아온 “촌놈”
농민들과 간척하고 산양 키워 ‘임실치즈’ 개발 성공
“잘 살게 됐는데 만족못해”…다리마비로 장애인 도와

     

     

그 무렵, 다른 외국 선교사들과 함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한국민들의 저항에 동참했다가 추방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오글 목사, 시노트 신부 잘 알지. 그때 그들과 함께 활동 많이 했어. 목요기도회엔 항상 참석했지. 그 두 분과 콜롬반회의 양 신부이든가 하는 분하고 내가 안기부한테 ‘제일 고약한 4명’으로 찍혔어.” 하지만 지 신부의 일상은 ‘운동’보다는 ‘일’에 절대적으로 무게가 두어졌다. “신부들끼리도 거의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일에 바빴다. 그런데 그 무렵, 1970년대부터 그는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다발성신경경화증을 앓기 시작했고 지금은 하반신 전체가 움직이기 힘들어 휠체어에 의존한다. 하지만 목발을 짚고 “매일 3천보씩 걷기 연습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다.” 자동차 운전도 한다. “위(상체)는 괜찮기 때문이다.” 다만 심장 부정맥 때문에 약을 먹고 있다.

1981년부터 3년간 벨기에에서 요양한 지 신부는 다시 돌아왔다. “그래, 이제 여기에 뼈를 묻자!” 1984년 전주교구 장애인사목 지도신부가 됐다.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장애인들의 고통과 기쁨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무지개가족’을 만들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재활의지를 북돋았다. ‘무지개장학재단’도 만들어 올해 처음 1200만원을 12명의 장애인 또는 그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내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 거야. 임실치즈 쪽에서 매달 300만원 정도씩 들어오고 호암상 사회봉사부문 수상자로 받은 1억원 등 모두 5억원의 자산도 있으니까.”

2003년 무지개가족 지도신부직에서도 물러나 지금은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서 ‘별아래’라는 집을 지어 무지개가족에서 함께 일했고, 장차 그 집을 물려받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물론 열심히 일하고 있다. 지금 빠져 있는 일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 천주교의 토착화와 현대화에 공헌한 민(뮈텔)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일기와 소식지 등 4500쪽에 이르는 문서들을 정리해서 책과 CD 등으로 묶어내는 작업이다. 벌써 15권 만들었고, 앞으로 4권 분량이 더 남았다. “한국어 번역은 한국인이 해야지.” 역사연구자들은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 자료들을 보면 정확하게 그것들을 확인할 수 있단다.

“거기 보면, 일제 때 일본인들이 한국을 천천히 뜯어먹어가는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어. 예를 들어, 서울로 가는 기차를 상행기차라 하잖아. 그런데 언제부턴가 부산쪽으로 가는 기차를 상행차라 부르도록 바꾸는 거야. 왜냐, 그 쪽이 (내지인) 일본에 가까운 쪽이니까.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아무도 모르게 (제도와 의식을) 바꿔 놓는 거야. 정말 놀랬어.”

3년의 본국 요양을 빼더라도 50년에 가까운 한국생활이 그는 좋았단다. “재미있게 지냈어요. 어디든지 가면 도와주고 협조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한 것은 그저 조금 돕는 것뿐이었어.” 한국인들의 자질에 대해서도 높은 점수를 준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 “그때(부임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사람들이 잘 살게 됐는데, 과연 그때보다 더 기쁘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느냐? 만족도 감사도 하지 않아.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행복을 위해 했고, 내가 한국에서 간척하고 치즈 만들고 한 것도 행복을 위해서였는데, 그렇다면 이거 실패한 것 아니여?”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2007-07-23 인터넷 한겨레.

Orinetale Op.37 No.2 in Twelve Spanish Dances

그라나도스 스페인 무곡

Enrique Granados 1867~1916

2. Orientale-Andante - 5. Andaluza

 

Alicia de Larrocha, piano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