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요한 스트라우스 II 세 왈츠 모음 │ 낭만파 후기

리차드 강 2018. 4. 12. 13:41

Johann Strauss II - Waltz

요한 스트라우스 II 왈츠

Johann Strauss II (1825.10.25 ~ 1899.6.3)

No.1. Wiener Blut Waltz Op.354

 

1. Wiener Blut Waltz Op.354
2. Geschichten aus dem Wiener Wald Op.325
3. An der schonen blauen Donau Op.314
4. Rosen aus dem Suden Op.388
5. Kaiser Waltz Op.437

빈기질 왈츠
빈 숲속의 이야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변에서
남국의 장미
황제 왈츠

     

요한 스트라우스 2세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과 같은 왈츠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곡가이다. 요한 스트라우스 1세의 아들로 작곡가인 Josef Strauss, Eduard Strauss가 그의 형제들이다. 그는 평생 동안 왈츠의 왕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19세기를 통해 비엔나 왈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합스부르크가 연회의 즐거움을 위해 작곡한 왈츠를 질적,양적으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왈츠의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왈츠를 변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왈츠의 선각자였던 아버지와 Josef Lanner(요제프 라너)보다도 더 큰 명성을 얻었다. 또한 폴카, 행진곡, 오페레타 "박쥐"로도 유명한 작곡가이다.

     

     

Johann Strauss II (1825~1899)

요한 스트라우스는 빈 태생의 오스트리아 지휘자이며 작곡가로서 그의 아버지도 똑같은 이름의 요한 슈트라우스(1804~1849)이다. 빈 왈츠의 최대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아버지도 이름난 왈츠 작곡가였으나, 그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에 이르러 왈츠의 황금시기를 이룩했으며 그 때문에 아버지를 "왈츠의 아버지" 아들을 "왈츠의 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9세인 1844년 이미 독립하여 사설 악단을 조직했으며 부친이 사망한 후부터는 부친이 관장하던 악단의 멤버와 함께 베를린, 파리, 페테르스부르크, 심지어는 바다를 건너 영국과 미국까지 연주 여행을 하기도 했다.

1863년 가수인 헨리에테 트레프츠와 결혼하고 그 후 두 동샌인 요제프(1827~1870)에두아르트(1829~1919)에게 맡긴 채, 주로 왈츠의 작곡에 전념했다. 그의 작품 번호는 479곡에 이르며 작품의 대부분이 빈 왈츠이다.

오페레타도 16곡이나 되며 그 가운데의 <집시 남작>이나 <박쥐>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중 오페라 대개는 왈츠나 폴카로 이루어진 경가극이라 하겠다.

그가 작곡한 왈츠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정확히 말한다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변에서 3. An der schonen blauen Donau Op.314>가 제목으로서 그대로 된 시의 한 구절 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빈 숲속의 이야기 2. Geschichten aus dem Wiener Wald Op.325>,<예술가의 생애>,<봄의 노래>,<남국의 장미 4. Rosen aus dem Suden Op.388>,<황제 왈츠 5. Kaiser Waltz Op.437>, <빈 기질 1. Wiener Blut Waltz Op.354>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애청되는 대표작이다. 빈에서 왈츠란 무도곡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엽이다.

당시 왈츠 작곡가로 빈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사람은 요제프 라너와 "왈츠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부친 요한 1세였다. 라너와 요한 1세는 10대에 발써 미하엘 파머의 댄스 밴드에 입단하여 서로 알게 되었는데 1819년에 이 악장을 나와 이미 자기들의 악단을 조직했다. 그 무렵의 왈츠는 8마디의 멜로디를 고작해야 2~3 번 되풀이해서 연주하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잚은 두 사람은 종래와는 다른 수준이 높은 왈츠를 만들어 그 인기를 높여 갔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각기 헤어져 자신들만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작곡과 연주에서 경쟁하게 된 것은 1825년 의 일이다. 이후 라너는 궁정 무도회 악장으로 취임하는 등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왈츠 <쇼부룬의 사람들>등과 같은 명곡을 남겼다.

한편, 요한 1세는 빈뿐 아니라 파리나 런던 등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여 국외에도 왈츠를 유행시켰으며 왈츠 <로렐라이-라인의 노래> <라데츠키 행진곡>등의 명작을 남겼다. 요한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한 2세는 동생 요제프 에두아르트와 함께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천부적인 음악의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 요한1세는 자식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2세는 그 무렵 상업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요한 2세는 어머니 안나의 이해와 도움으로 몰래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을 공부 했으며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 요한 1세와 비록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는 한이 있어도 음악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1844년 10월에 자기 악단을 결성하여 데뷔했으며 이로부터 아버지 요한 1세의 선의의 라이벌로 등장하여 서로 인기를 다투게 된다. 요한2세의 초기 작품에는 아버지 요한 1세와 특히 라너 등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1849년 아버지의 사망 후 그 오케스트라를 흡수 합병 함으로써 서서히 자기만의 독자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1852년에 작곡된 <사랑의 노래>등은 상당히 진전을 보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요한 2세는 뜰새가 없이 바빴는데 매일 밤 2.3개의 무도회장에서 겹치기 연주를 하고 낮에는 작곡과 오케스트라 연습, 일요일에는 명곡 콘서트에 정기적으로 출현하는 외에 객원연주 여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엔지니어로 자리를 잡은 요제프가 형 요한2세의 바쁜 생활을 보다 못해서 음악가로 전향한 것은 1853년 외교관을 지망하고 있던 에두아르트가 음악가로 데뷔한 것은 1859년이었다. 이로써 두 동생과 일을 분담해서 하게 되자 여유가 생긴 요한 2세는 바야흐로 "왈츠의 왕"다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가속도>,<아침 신문>,<빈의 봉봉>,<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예술가의 생애>,<빈 숲속의 이야기>,<술, 여자, 노래>,<인생의 기쁨>등등 소위 일련의 명곡들이 이 시기에 (1866년부터 1870년사이)완성되었다. 요한 2세가 노페레타를 본격적으로 작곡하게 된 것은 1870년 이후의 일이었다.

음악의 좋은 이해자였던 어머니와 동생 요제프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마음의 충격을 받은 그는 무도 음악의 창작 황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와 명예로운 궁정무도회 악장의 지위를 동생 에두아르트에게 물려준 그는 마음의 상처가 차차 가라앉자 창작 활동을 재개했는데 왈츠가 아니라 감상하는 음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871년에 초연된 최초의 오페레타 <인디고와 40명의 도둑>은 그리 뛰어난 작품 이러고 말 할 수 없으니 그의 명성에 힘입어 꽤나 인기를 모았다. 이어 <로마의 사육제>1874년 이후 오늘날에도 자주 상연되는 유명한 <박쥐>가 탄생되었다. 그 후 <빈의 카리오스트로>,<메투잘렘 왕자>,<술래잡기>,<여왕의 레이스손수건>,<유쾌한 전쟁>,<베네치아의 하룻밤>그리고 유명한 <집시 남작>이 연이어 작곡되었다. 이 동안에 왈츠 등의 무도곡을 전혀 작곡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언급하지만 <빈 기질>,<레몬꽃 피는 곳>,<봄의 소리>,<아름다운 5월>,<남국의 장미>,<보석의 왈츠>등도 함께 완성되었다.

1872년 미국으로 연주 여행하여 큰 인기를 모았으며 <헤럴드 왈츠>를 작곡하여 미국인들 에게 선물했다. 1886년 이후에도 오페레타나 가극 <기사 파츠만>혹은 미완성 상태로끝난 발레 음악 등의 무대 작품을 계속 쓰는 한편 <빈의 아가씨>,<황제 원무곡>,<동양의 이야기>등 감상에 어울리는 왈츠를 작곡했다.

슈트라우스 집안, 특히 "왈츠의 왕" 요한2세의 작품은 19세기 사람들을 춤추게 하여 즐거움을 안겨 준 대중적인 음악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다른 유행 작곡가들의 작품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시대를 초월한 예술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Viennese Waltz 비에니즈 왈츠

-가장행렬 대신 번성한 왈츠 무도회
-전 세계로 생중계 되는 ‘오페라 볼’
-‘노숙자 볼’‘사냥꾼 볼’ 등 이색행사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비엔나에서 왈츠가 부흥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엄격한 어머니 역할을 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1717~1780)은 카니발 기간 동안 가장 행렬을 비롯한 요란한 행사를 금지했고 귀족들에 한해서만 궁전에서 가면무도회를 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후 ‘백성의 황제’로 불렸던 아들 조세프 2세는 모든 백성들에게 화려한 카니발행사를 허락했고 무도회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에는 가장 퍼레이드로 진행되는 요란한 카니발 행사가 드물고 1~2월이 되면 볼 시즌(Ball Season)을 맞아 거의 매일 무도회가 개최된다.

하지만 당시의 무도회는 신체의 접촉이 거의 없는 폴로네이즈, 양식화된 미뉴엣 등의 춤이 주 무대를 이루는 차분한 자리였다. 그래서 왈츠가 무도회에 등장한 초창기에는 남녀가 가까이 몸을 당겨서 추는 이 춤이 매우 부도덕하게 여겨졌다. 그것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 광경이었으면 한 공작은 “왈츠는 추는 여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정도였다.

그런 반발과 상관없이 왈츠는 대중화를 거듭해 1837년 합법성을 인정받았으며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무도회의 댄스가 되고 있다. 메인 홀 외에 부속실에서는 왈츠가 아닌 모던음악, 탱고, 디스코, 하우스 비트에 맞춘 댄스판이 벌어지는 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많았지만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는 전통은 오프닝으로 처음 무도회에 참가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데뷔무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무도회가 상류층에서 사교계의 정식 데뷔무대였던 전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무도회 중에서도 비엔나 오페라하우스에서 진행되는 비엔나 ‘오페라 볼’은 전 세계 수십 만명의 시청자에게 생중계되는 비엔나 최고의 이벤트이다. 오스트리아 정부 관료와 해외의 유명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5000여명의 시민들이 그에 지지 않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선다.

수천명의 인원이 완벽하게 정장을 갖춘 장관을 볼 수 있는 기회로, 이에 대한 비엔나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오는 2월19일에 개최될 오페라 볼은 물론이고 내년 행사의 박스(Box)는 이미 예매가 모두 끝난 상태, 지금 예약하면 2006년의 오페라 볼에나 박스를 예약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비용도 9,000~36,000유로에 달하는 고가이기 때문에 오페라 볼에 참가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평생의 꿈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페라 볼이 아니더라도 비엔나의 볼은 다양하다. 전통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사냥꾼들의 볼’, 노숙자들을 위한 ‘홈리스 볼’, 형편없는 음악에 볼썽사나운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나쁜 취향의 볼’ 등 각가지 주제의 다양한 볼이 진행되고 있다. 무도회를 사랑하는 비엔나 사람들은 새벽 2~3시까지 , 5시까지도 춤을 춘다. 그렇다고 춤만 출 수 있는가. 볼 시즌 동안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면 멋지게 차려입는 젊은 남녀들이 가판대 앞에서 게걸스럽게 핫도그를 먹어 치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비엔나왈츠의 기원

비엔나왈츠의 기원과 발전의 과정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춤의 발생기원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의 알프스지방의 오랜 전통에 뿌리를 두고 강한 민속무용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클로즈드 홀드를 한 상태에서 연속회전만을 3박자의 음악에 주로 맞추어 추는 이 춤은 다양한 이름으로 수백년 동안 전래되어 왔다. 원무인 이 춤의 명칭은 스핀너(spinner:실감는 기계 또는 휠러 wheeler: 큰수레바퀴)등으로 묘사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19세기 중에 '요한 스트라우스월츠'가 유행함에 따라서 오늘날 이 춤을 '비엔나 왈츠'라고 한다. 내츄럴 턴와 리버스 턴 등의 진행성 회전운동은 훗날 프랑스의 7월 대혁명(1789년)으로 루이왕조의 몰락과 함께 특권계층의 춤인 군무의 궁중무도)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거쳐 대중화되면서 거리의 술집 등지에서 추어진 비엔나 왈츠가 상류사회의 넓은 무도장으로 옮기게 되어 오늘날의 형태인 남녀1조의 완전한 사교무도로 발전된 것은 요한스트라우스월츠의 유행과 함께 경쾌함을 좋아하는 비엔나 사람들의 기질은 비엔나왈츠 음악의 템포를 점차 빠르게 연주하였으며 각 스텝의 액센트를 강조하던 중후한 느린 풍의 왈츠도 점차 제1박만을 강조하는 악상으로 변하여 갔다.

1953년 5월에 이 비엔나왈츠를 세계댄스스포츠평의회에서 경기종목으로 체택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서 이를 세계무도경기대회 및 국제무도경기대회 등에서 정식경기종목으로 체택하게 되면서 이의 명칭을 비엔나왈츠라 명명하였다.

일반적 비엔나왈츠는 '컨츄리 비엔나왈츠'라 하며, 경기대회에서 사용하는 비엔나왈츠는 '콘티넨털 비에나왈츠'라고 한다. 전자의 피겨는 약 8개 정도이며, 후자의 피겨는 6개의 리버스 Fleckerl에서 내츄럴 Fleckerl를 이어주는 콘트라 체크가 추가된다.

이 춤을 추는 방법은 슬로우 템포의 월츠와의 구별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추는 것이 중요하다. 즉, 첫째는 라이즈와 폴을 최대한 억제하고 상체의 긴장과 완화와의 차이도 최소한으로 제한하며, 풋위크도 될 수 있는 한 플랫에 가깝게 제한하여 놓아야 한다.

둘째는 음악과 피겨의 변화를 8소절의 단위로 하여 체인지, 내츄럴, 리버스와 같이 하며, 또 Fleckerl에 있어서 악절의 교체도 리버스부터 시작하여 좌측으로서 콘트라 체크를 하고, 체크 백(CHECK BACK) 할 때까지 1소절을 요구하는 것을 고려하여 악절과의 조화를 계산하여야 한다. 또한 스타트할 때에는 2소절을 기다린 후에 우측부터 시작한다.

이 춤은 모던댄스이지만 무도강사자격시험에서 채택하는 협회와 채택하지 않는 협회가 있으며, 채택하는 협회에서는 때로는 채택하지 않을 때도 있다. 스무어, 죠세핀 브렛드레, 필리스 훼일러 여사 등이었다.

 

비엔나왈츠란?

왈츠란 독일어로 "파도치듯 떠오르고 내려간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춤은 이미 1780년경 남부 독일의 농부들이 추었던 렌들러(L ndler)라는 민속 춤에서 유래되었으며 19세기 초 유럽 사교계에 소개되었을 때는 빠르게 우회전과 좌회전을 하는 춤이었습니다. 그러나 1차 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에서 발생한 새로운 리듬에 영향을 받은 왈츠는 두가지 형태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하나는 속도가 느린 모던 왈츠(Slow Waltz)이고, 다른 하나는 빠른 속도로 추는 비엔나 왈츠(Quick waltz)입니다.왈츠는 기본적으로 상승(rise)과 하강(fall)을 강조하는 기품 있고 아주 우아한 춤입니다.음악: 왈츠는 3/4 박자로서 첫번째 박자에 강한 액센트가 있으며 1분간 대략 28∼30 소절의 템포이며 비엔나 왈츠는 1분간 보통 60소절의 템포로 추어집니다.

 

비엔나왈츠의 특징

비엔나 왈츠의 액센트는 제2박 보다 약간 선행하는 선입음(Anticipated Beat)으로 인하여 더 한층 흐르는 경향을 가지고추진력과 회전력의 원천이 되는 스윙을 주게 된다. 종래의 단일 선율의 무곡은 요세프 런너(Josef Lanner)와 요한 스트라우스 등의 주도로 5내지 6가지 선율(멜로디)을 연쇄적으로 접속한 오늘날의 원무곡 형식으로 발전하였으며 이 음악에 안무를 할 때는 피겨를 바꿀 때 마다, 다음 음악 소절(BAR)에 동시성(싱크로나이즈)을 갖게 하여야 하고, 악절의 길이는 16소절의 단위로써 반복하거나 다른 악절로 바꾸게 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왈츠는 클래식 발레의 풋워크였으나 농촌의 농민들이 추는 비엔나왈츠는 두발의 방향이 평범하게 하여 동일 방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왈츠로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Strauss Johann II 1825-1899)

아버지(1804-1849)와 아들 성이 같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 그래서 아버지를 슈트라우스 1세 아들을 슈트라우스 2세라고 한다. 슈트라우스 부자는 비엔나 왈츠를 세계적인 음악으로 완성시켰기에 아버지를‘왈츠의 아버지’, 아들은 ‘왈츠의 왕’이라고 부른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지휘자. ‘왈츠의 왕’으로 불리며 ‘왈츠의 아버지’ J.B.슈트라우스의 장남이다. 아버지는 처음 그를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입학시켜 은행업을 배우게 하였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이 강한 그는 아버지 몰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1843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별거생활을 하자 이를 기회로 생애를 음악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피아노 교수로 생계를 꾸리면서 바이올린 외에 작곡이론을 배웠다. 처음에는 교회음악 작곡에 뜻을 두었으나, 19세 때 시 당국의 허가를 얻어 15인조악단을 조직, 무도회에 데뷔하여 그 자신의 작품 1∼4번의 무도곡을 연주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46년에 일단 수습되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악단에는 가담하지 않고 자기 악단을 인솔하여 독립활동을 계속하였으며, 49년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악단도 지휘하게 되어, 동생이 악단에 가담하기까지 수년간 그는 분주한 세월을 보냈다.

51년에는 함부르크·프라하·드레스덴·라이프치히·바르샤바 등지에서 연주를 하고, 분주한 가운데 작곡에도 열중하여 53년에는 1년 동안에 27곡 이상을 작곡하였다. 그러한 정열적인 활동으로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자 악단을 동생에게 맡긴 후 요양지로 옮겨다니다가 건강을 회복한 그는 55년에 다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까지 연주여행을 하였다. 62년 통칭 예티(Jetty)라고 불린 가수 헨리에테 트레프츠와의 결혼으로 커다란 전기를 맞았다. 그의 연주는 공원에서의 연주회와 자기 작품의 첫공연에 한정되고, 온갖 정력이 작곡에 투입되어 새로운 독자적인 왈츠양식 ‘연주회왈츠’를 낳았다.

《아침 신문》(1864)을 비롯하여 67년부터는 왈츠에 처음으로 합창이 곁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예술가의 생애》 《빈 숲속의 이야기》 《술·여자·노래》 《빈 기질》 등의 대규모 왈츠의 걸작을 계속 작곡하고, 70년 어머니와 동생 요제프가 모두 세상을 떠나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오펜바흐와 수페 등에게서 자극을 받아 그때부터 오페레타의 작곡도 시작, 《박쥐》 《집시남작》을 비롯한 작품으로 당시 빈 오페레타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78년 아내가 죽자 30세 연하인 릴리 디트리히와 재혼했으나 어울리지 않는 이 결혼은 얼마 후 파탄되고 87년 아델레 도이치와 재혼, 빈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받는 만년을 보냈다. 그는 오페레타 16, 왈츠 168곡을 비롯하여 많은 무도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모든 작품에는 인생을 찬미하는 빈의 독특한 분위기가 담겨 있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