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 Strauss II (1825~1899) 요한 스트라우스는 빈 태생의 오스트리아 지휘자이며 작곡가로서 그의 아버지도 똑같은 이름의 요한 슈트라우스(1804~1849)이다. 빈 왈츠의 최대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아버지도 이름난 왈츠 작곡가였으나, 그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에 이르러 왈츠의 황금시기를 이룩했으며 그 때문에 아버지를 "왈츠의 아버지" 아들을 "왈츠의 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9세인 1844년 이미 독립하여 사설 악단을 조직했으며 부친이 사망한 후부터는 부친이 관장하던 악단의 멤버와 함께 베를린, 파리, 페테르스부르크, 심지어는 바다를 건너 영국과 미국까지 연주 여행을 하기도 했다. 1863년 가수인 헨리에테 트레프츠와 결혼하고 그 후 두 동샌인 요제프(1827~1870)와 에두아르트(1829~1919)에게 맡긴 채, 주로 왈츠의 작곡에 전념했다. 그의 작품 번호는 479곡에 이르며 작품의 대부분이 빈 왈츠이다. 오페레타도 16곡이나 되며 그 가운데의 <집시 남작>이나 <박쥐>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중 오페라 대개는 왈츠나 폴카로 이루어진 경가극이라 하겠다. 그가 작곡한 왈츠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정확히 말한다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변에서 3. An der schonen blauen Donau Op.314>가 제목으로서 그대로 된 시의 한 구절 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빈 숲속의 이야기 2. Geschichten aus dem Wiener Wald Op.325>,<예술가의 생애>,<봄의 노래>,<남국의 장미 4. Rosen aus dem Suden Op.388>,<황제 왈츠 5. Kaiser Waltz Op.437>, <빈 기질 1. Wiener Blut Waltz Op.354>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애청되는 대표작이다. 빈에서 왈츠란 무도곡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엽이다. 당시 왈츠 작곡가로 빈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사람은 요제프 라너와 "왈츠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부친 요한 1세였다. 라너와 요한 1세는 10대에 발써 미하엘 파머의 댄스 밴드에 입단하여 서로 알게 되었는데 1819년에 이 악장을 나와 이미 자기들의 악단을 조직했다. 그 무렵의 왈츠는 8마디의 멜로디를 고작해야 2~3 번 되풀이해서 연주하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잚은 두 사람은 종래와는 다른 수준이 높은 왈츠를 만들어 그 인기를 높여 갔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각기 헤어져 자신들만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작곡과 연주에서 경쟁하게 된 것은 1825년 의 일이다. 이후 라너는 궁정 무도회 악장으로 취임하는 등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왈츠 <쇼부룬의 사람들>등과 같은 명곡을 남겼다. 한편, 요한 1세는 빈뿐 아니라 파리나 런던 등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여 국외에도 왈츠를 유행시켰으며 왈츠 <로렐라이-라인의 노래> <라데츠키 행진곡>등의 명작을 남겼다. 요한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한 2세는 동생 요제프 에두아르트와 함께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천부적인 음악의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 요한1세는 자식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2세는 그 무렵 상업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요한 2세는 어머니 안나의 이해와 도움으로 몰래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을 공부 했으며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 요한 1세와 비록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는 한이 있어도 음악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1844년 10월에 자기 악단을 결성하여 데뷔했으며 이로부터 아버지 요한 1세의 선의의 라이벌로 등장하여 서로 인기를 다투게 된다. 요한2세의 초기 작품에는 아버지 요한 1세와 특히 라너 등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1849년 아버지의 사망 후 그 오케스트라를 흡수 합병 함으로써 서서히 자기만의 독자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1852년에 작곡된 <사랑의 노래>등은 상당히 진전을 보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요한 2세는 뜰새가 없이 바빴는데 매일 밤 2.3개의 무도회장에서 겹치기 연주를 하고 낮에는 작곡과 오케스트라 연습, 일요일에는 명곡 콘서트에 정기적으로 출현하는 외에 객원연주 여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엔지니어로 자리를 잡은 요제프가 형 요한2세의 바쁜 생활을 보다 못해서 음악가로 전향한 것은 1853년 외교관을 지망하고 있던 에두아르트가 음악가로 데뷔한 것은 1859년이었다. 이로써 두 동생과 일을 분담해서 하게 되자 여유가 생긴 요한 2세는 바야흐로 "왈츠의 왕"다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가속도>,<아침 신문>,<빈의 봉봉>,<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예술가의 생애>,<빈 숲속의 이야기>,<술, 여자, 노래>,<인생의 기쁨>등등 소위 일련의 명곡들이 이 시기에 (1866년부터 1870년사이)완성되었다. 요한 2세가 노페레타를 본격적으로 작곡하게 된 것은 1870년 이후의 일이었다. 음악의 좋은 이해자였던 어머니와 동생 요제프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마음의 충격을 받은 그는 무도 음악의 창작 황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와 명예로운 궁정무도회 악장의 지위를 동생 에두아르트에게 물려준 그는 마음의 상처가 차차 가라앉자 창작 활동을 재개했는데 왈츠가 아니라 감상하는 음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871년에 초연된 최초의 오페레타 <인디고와 40명의 도둑>은 그리 뛰어난 작품 이러고 말 할 수 없으니 그의 명성에 힘입어 꽤나 인기를 모았다. 이어 <로마의 사육제>와 1874년 이후 오늘날에도 자주 상연되는 유명한 <박쥐>가 탄생되었다. 그 후 <빈의 카리오스트로>,<메투잘렘 왕자>,<술래잡기>,<여왕의 레이스손수건>,<유쾌한 전쟁>,<베네치아의 하룻밤>그리고 유명한 <집시 남작>이 연이어 작곡되었다. 이 동안에 왈츠 등의 무도곡을 전혀 작곡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언급하지만 <빈 기질>,<레몬꽃 피는 곳>,<봄의 소리>,<아름다운 5월>,<남국의 장미>,<보석의 왈츠>등도 함께 완성되었다. 1872년 미국으로 연주 여행하여 큰 인기를 모았으며 <헤럴드 왈츠>를 작곡하여 미국인들 에게 선물했다. 1886년 이후에도 오페레타나 가극 <기사 파츠만>혹은 미완성 상태로끝난 발레 음악 등의 무대 작품을 계속 쓰는 한편 <빈의 아가씨>,<황제 원무곡>,<동양의 이야기>등 감상에 어울리는 왈츠를 작곡했다. 슈트라우스 집안, 특히 "왈츠의 왕" 요한2세의 작품은 19세기 사람들을 춤추게 하여 즐거움을 안겨 준 대중적인 음악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다른 유행 작곡가들의 작품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시대를 초월한 예술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