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평균율 - 이순열/음악평론가 바 흐의 평균율은 거대한 나무가 아니라, 그 나무들이 삼립(森立)해 있는 울창한 숲이라고 슈바이처는 말한다. 그런데 누가 그 숲의 원근을 제대로 조망하고 올바르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건 어떤 음악입니까?” 음악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어느 도인에게 평균율 음반을 선물했더니 이렇게 물었다. 바흐의 평균율에서 어떤 결론을 찾으려 하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미리 알려고 하다면 아예 접근조차 하지 말아야 할 작품임을 나는 믿고 있다. 그래서 한참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바흐의 법어집(法語集)입니다” ‘묘한 나무로구나’ 그렇게 느끼면서 바라보는 순간 그 나무의 실체가 사라져버린 듯한, 그래서 바흐의 평균율은 나무가 아니라 거대한 숲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이중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 음악이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더욱 돋보이다 “평 균율 클라비어곡집, 모든 온음과 반음을 장3도, 즉 도레미에 관해서나 단3도, 즉 레미파에 관해서도 활용하여 만든 전주곡과 독가 모음이다. 학습중인 젊은 음악도들이 유익하게 이용하고 숙달된 사람들이 소일거리고 삼을 수 있도록 안할트 쾨텐궁의 악장이자 궁정 실내악단 단장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쓰다. 1722년” 이것이 24곡의 평균율(바흐는 훗날 다시 24곡을 써서 모두 48곡이 되었다)에 대한 바흐 자신의 변이다. 드높은 산을 만들어 놓고 이것은 보잘 것 없는 작은 언덕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의 겸허함을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들여, 오랫동안 이 작품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오히려 돋보이는(後其身而身先) 겸허함의 빛을 알아보는 혜안은 언제나 드물고, 그래서 이 작품은 오랫동안 그저 초보자를 위한 교재쯤으로 여겨져 왔다. 형 태상으로는 한 옥타브를 반음으로 12등분하는 평균율법과 그 장조와 단조의 모든 조성을 활용하여 작곡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 평균율의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 카스퍼 페르디난트 피셔(1665-1746)가 바흐보다 7년 앞서 아리아드네 무지카(Ariadne musica)에서 비슷한 시도를 한 적이 있어 평균율을 바흐의 독창적인 공로로 귀속시킬 수는 없다. 문제의 초점은 평균율이라는 조율법의 확립이라거나 작곡 영역의 프리즘을 극한에 이르도록 확대했다거나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내재적인 세계의 무한함이며, 48곡의 전주곡과 푸가 하나 하나가 제각기 다른 우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흐는 그 우주의 아득한 별자리의 명멸하는 빛을 살짝살짝 스치게 할 뿐이지만 짧게 명멸하는 그 빛 속에 얼마나 광활하고 무한한 세계가 움츠리고 있는가. 이 마이크로코스모스의 전경(全景)을 1930년대 중반에 최초로 녹음한 에드빈 피셔 이후 반다 란도프스카, 헬무트 발햐, 호르로프스키, 로잘린 투렉,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글렌 굴드, 콜린 틸리, 그 스타프 레온하르트, 프레드리히 굴다, 발레리 아파나시예프, 삐에르 앙따이, 다비트 모로네 등이 제각이 화필을 들어 이 우주의 숲을 그리려 했다. 어떤 이는 각선법(angular perspective)으로, 어떤 이는 직선법(linear perspective)으로, 어떤 이는 평행법(parallel perspective), 어떤 이는 등선법(isometric perspective) 등으로 제나름의 잣대를 지녀, 그것으로 바흐를 풀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한 잣대일 수는 없다. 바흐라는 굵고 단단한 중심축 니 콜라예바의 바흐는 극광의 빛으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거나 벅찬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에 파문을 일게 하는 그런 연주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바흐에는 언제나 들을 만한 그 무엇이 담겨 있다. 어느 작곡가를 연주할 때도 예외일 수는 없지만, 바흐의 연주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선 바흐에 대해 남다른 사랑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니콜라예바는 누구 못지 않게 바흐에게 사랑을 쏟아 왔고, 그와 깊은 인연을 맺어 왔다. 1950년 라이프치히의 바흐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타 티아나 페트로브 니콜라예바는 1924년 러시아의 베지짜(Bezhitza)에서 태어나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로부터 네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모스코바 중앙 음악학교에서 어머니의 스승이기도 했던 알렉산더 골덴바이스한테서 피아노를 배우고 모스코바 음악원에 진학한 후에도 계속해서 골덴바이스의 훈도를 받았다. 그리고 음악원을 졸업하고 나서도 3년을 더 머물면서 에프게니 골루베프부터 작곡법을 배우고, 칸타타 ‘행복의 노래’ 및 피아노 협주곡으로 작곡과를 졸업하여 한 때는 작곡과 피아노 연주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기도 했다. 니 콜라예바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고, 그녀가 연주해왔던 피아노 협주곡만 해도 무려 50여 곡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의 중심축은 언제나 바흐였다. 그녀의 건장한 체구 탓도 있겠지만, 니콜라예바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굵직굵직한 선을 그어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녀가 열정에 넘치고, 때로는 정서적인 충동을 여과 없이 폭발시키는 연주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폭발음이 요란하게 진동하는 법은 거의 없다. 그녀의 바흐 또한 디테일에 구애되지 않고 때로는 격정이 폭발하지만, 그 격정에는 약음기, 아니면 머플러로 둘러싸인 듯 그 폭발음은 결코 요란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 파문은 넓고 깊다. 그 파문이 가라앉고 나면 뜻밖에도 담담하고 소박하면서도 청초하고 고고한 기품이 흡사 구양순의 오묘한 필치를 연상케 한다. 니콜라예바의 평균율은 그녀의 다른 바흐 연주와 마찬가지로 거침없는 물줄기의 분방한 흐름으로 시원시원하게 뻗어간다. 그러나 때로는 d단조의 푸가에서처럼 대위법적인 초관을 뚜렷이 부각시키면서도 깊은 명상으로 침잠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도약과 열락, 수면 속에 숨겨진 산호군의 화사한 색채가 춤추는 듯한 신비의 무희가 너울거린다. 니콜라예바의 평균율은 1984년 일본의 이마이찌 홀에서 녹음한 것과 1971년-72년 모스크바에서 녹음한 것 등 2종이 있는데, 이번에 아울로스에서 내놓은 것은 1970년대 초의 멜로디아판을 음원으로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