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음악의 다양한 수용 베토벤과 그의 음악처럼 다양하게 해석되고 모순되게 수용된 경우도 드물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에게 베토벤은 "음악 종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위대한 사제"였다면, 1830년 7월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는 애국적 혁명가로 여겨졌다. 반면에 1871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군사적, 국수주의적인 독일 제국 수립기 동안에 베토벤의 음악은 "국가음악의 상징 그 자체"로 여겨졌다. 또 미국인들은 그를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찬양한 반면에, 혁명이 일어난 소련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사회주의 혁명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차 대전에 패한 독일의 국수주의자에게는 "베르사이유 조약도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성"이요, "독일민족의 지도자"로 받아들여졌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학살 때에도 베토벤의 <환희에의 송가>가 불려졌고, 동독이 무너진 후 통독을 축하하는 기념식 때에도 인류애를 노래하는 베토벤의 9번이 연주되었다. 베토벤 신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작품은 오히려 음악적으로 논란이 많은 9번 교향곡의 4악장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 하다. 바그너만 하더라도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9번 교향곡의 "가장 약한 부분"을 4악장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단순히 예술사적으로만 중요하다"라고 쓰고 있다. 칼 네프도 4악장의 형식적인 부족함을 비판한다. 실제로 9번 교향곡(첫 세 악장과 4악장간)의 형식적, 구조적인 단절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9번 교향곡이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위의 다양한 수용이 보여주듯이- 다양한 측면의 "다양한 정보성" 때문이었다 할 수 있겠다. 여기에 <환희에의 송가>가 기여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베토벤이 쉴러의 텍스트를 자신의 음악에 맞게 편집하는 과정에서 가사가 애매하고 일반적인 내용으로 되어, 수용자들이 원하는 각각의 맥락에 어려움 없이 끼워 맞춰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베토벤의 생명력에는 그의 작품이 여러 가지 오용에 노출되어 있는 등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베토벤이 "오늘날 어떤 면에서 존 케이지보다 마르린 몬로와 더 공통점이 많다"라는 앤디 워홀의 암시는 베토벤의 이미지가 세속화 내지 천박화되고 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작곡가에게는 "베토벤이 더 이상 예술적 체험을 위한 원천이 되지 못하고" 대중문화의 "죽은 초상화"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베토벤 신화를 만든 낭만주의 음악가들도 얼마가지 않아 자신들의 모범이었던 베토벤이 처음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오해되어 찬양되는 것에 실망하였다. 1870년 비인에서 열린 베토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베토벤의 후계자로 자처하던 음악가마저 참석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는 물론 개인적인 이해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순수하게 베토벤을 기리는 행위가 이미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때, 바그너는 어느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고 베토벤을 기리는 유명한 글 "베토벤"을 썼다. 글로써 베토벤을 기리게 된 동기로 그는 "어떤 행사도 그에게 품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밝힌다. 또한 1927년 비인을 중심으로 한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역시 베토벤 음악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쇤베르크와 같은 음악가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정치가들과 행정적인 대표인사들이었다. 이미 매우 보수화 되었던 리햐르트 슈트라우스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곡가들은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 당시 이미 베토벤은 음악적 엘리트들에게 회의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베토벤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사실도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치시기(1933-1945)의 베토벤 오용 히틀러는 2차대전이 일어나자 "한 사람의 독일인인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영국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라고 독일인의 우쭐함을 더욱 부채질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물론 이런 투의 표현은 히틀러에게서 처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슈만은 1838년 "베토벤과 같은 사람하나가 6명의 외국 천재와 맞먹는다"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베토벤의 천재성을 얘기해 왔으므로 베토벤을 통해 독일음악의 우월성과 독일 민족의 음악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은 독일인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치의 베토벤 찬양은 국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데 좋은 수단이 되었다. 특히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고 노래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음악적으로 우수한 독일 민족 공동체의 형성에 대한 환상을 줄 수 있는 모범적 작품이었다. 베토벤이 우선적으로 독일 내에서 독일인의 우월성을 보장하는 상징으로 이들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반면에, 대외적으로는 나치들의 진정한 속셈을 잘 가리는 알리바이 구실을 했다. 1936년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경기가 개최되었을 때, 베토벤의 9번 합창 환희에의 송가를 6000명의 베를린 중 고등학생들을 동원하여 개막식에서 부르게 하였다. 웅장하고도 뛰어난 연출에 대한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당시의 국제올림픽위원회장은 개막식 행사에 탄복하여 독일 국민과 히틀러에게 감사를 전하기까지 했다. 유대인에 대한 테러로 세계로부터 빈축을 샀던 독일정부가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환희의 송가>의 메시지로 나치당이 폭력단체가 아니라 평화적인 정부라는 눈가림을 하였는데 이것이 좋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얼마가지 않아 (2년 후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작으로) 히틀러의 침략전쟁과 팽창정책은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올림픽 행사처럼 국제적으로 히틀러 정부의 명예를 높이는데, 독일 오케스트라와 그 지휘자들의 공로가 컸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푸르크뱅글러, 멩겔베르크, 크나퍼부쉬, 뵘, 아벤트로트, 그리고 1933년 이후 나치당원이 되어 급속도로 출세하게 되는 카라얀 등은 나치의 외교 정치적 프로그램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7년부터 다시 푸르트뱅글러의 지도하에 들어간 베를린 필하모니는 "독일민족의 음악적 영혼의 신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까지 평가되었으며, 지휘자 푸르트뱅글러는 개인적으로 유대인 음악가나 아방가르드음악가를 보호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치 문화정책에 효과적으로 기여한 것은 틀림이 없다. 푸르트뱅글러의 뛰어난 역할은 괴벨스가 감동하여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할 정도였다. 1939년 11월 22일 "그는(푸르트뱅글러-역주) 외국에서 우리를 위해 위대한 업무를 수행했다"라고 괴벨스는 적고 있다. 또 1940년 1월 9일의 일기에는,
"푸르트뱅글러가 스위스와 헝가리 연주여행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를 아주 잘 이용할 수 있다. 요즘 그는 아주 말을 잘 듣는다. (...)그는 우리의 음악적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프라하로 갈려고 한다. 이것은 정말 긴요한 일이다"
라고 쓰고 있으며, 1940년 6월 20일에는 "그는 이제 진짜 쇼비니스트(광신적 애국주의자-역주)가 되었다"라고 괴벨스는 기뻐하고 있다. 망명작가 토마스 만이 "취리히나 파리 혹은 부다페스트에서 베토벤을 지휘하도록 히틀러에 의해 파견된 지휘자가 '나는 음악가일 뿐이며, 그래서 음악만을 할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흉칙한 거짓말을 하는 짓이다"라고 한 것은 이렇게 볼 때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나치의 외교관'으로 훌륭한 역할을 한 데는 "미적 향유를 주는 일종의 피난처로써 잠시 잔인함을 잊게 하는" 기능이 한 몫 했던 것 같다. 베토벤의 9번은 전체 나치시기를 통틀어 자주 연주되었으나, 특히 전쟁중인 1941년과 42년의 모든 심포니 레퍼토리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는 통계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하겠다. 이미 1927년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패전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수주의자들에게 베토벤의 음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를 주는 음악"이었음을 앞에서도 보았다. 이제 반대로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프랑스 인에게 베토벤은 "다른 누구보다도 인간의, 모든 인간의 가슴에 와 닿는 작곡가"였다. 독일군에 점령된 프랑스 라디오에서 1943년 멩겔베르크의 지휘하에 베토벤 9번이 연주되었고, 아벤트로트는 라이프찌히 게반트오케스트라로 파리의 Palais de Chaillot에서 같은 곡을 지휘하였다. 아이러니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경우는 나치들의 수용소와 게토에서 비인간적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였고, 가스실에서조차 <환희에의 송가>를 불렀던 사실이다. 당시 10세로 살아남았던 한 소년이 그 후 이 멜로디의 기원과 의미를 알게 되자, 왜 하필 이 노래가 그 장소에서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하게 되며 회의를 그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가끔 나는 (...) 이것이 범죄와 대중학살에 대한 정신의 반항이요 저항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는 때로 이 노래에 회의를 가진다. 어쩌면 이 노래를 선택한 것에서 엄청난 신랄함과 악마적 태도가 표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량학살은 분명하다. 갈 때까지 간 극단적 악이다. 그러나 죄 없는 아이들에게 이 축제적인 가사와 음악을 부르게 한 것 역시 죄악이다"
베토벤 음악 뿐 아니라 (현대음악을 제외한) 음악의 모순적인 사용은 나치 수용소(KZ)에 수감된 포로들에게도 대립적인 엇갈린 의견으로 나타난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폴랜드 유대인은 "KZ에서 음악과 노래가 포로들의 정신적 자기 방어에 기여했다"고 1977년 말하였던 반면, 다른 포로는 "KZ에서 음악의 역할은 마찰 없는 훈련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KZ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가끔 기분전환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들의 견해는 모두 다 각자의 입장에서 옳을 지 모른다. 스스로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폴랜드 유대인은 순진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당시 많은 포로들이 느꼈던 것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1943년 드랑시에서 아우슈비츠로 수송된 성악가 파니아 페네론의 증언을 들어보자.
"파파파팜...여기는 런던이 아니다. 내가 기억으로 써 낸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첫 악장을 연습하는 우리(KZ-역주)의 오케스트라이다. 이 파파파팜이 내게 기쁨을 주었다.(...) 내게는 아주 드문 기쁨이다. 그녀(당시 KZ에서 동료 수용인들의 반장격인 카포 역할을 했던 로제 사중주 설립자의 딸인 알마 로제를 지칭함, 페네론이 적대시했음-역주)는 나의 악의적 기쁨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지배자인 SS(나치 엘리트 조직-역주) 요원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이 음악을 BBC의 한 지부인 "해방된 프랑스" 방송의 시그널 음악과 연결시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여기서 페네론의 경우는 베토벤 음악이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위로일 뿐 아니라, 상징적이나마 적들에게 저항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놀려주는 즐거움을 함께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페네론의 복잡한 심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또 5번 교향곡이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다른 포로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여기서의 음악행위도 결국은 나치의 정치적 목적 달성, 즉 수용소의 질서 유지와 대외적으로(예를 들면, 적십자 등의 단체가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포로들의 연주로) 휴매니즘적인 인상을 준다는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보고에서처럼 실제 유대인의 게토인 테레지엔슈타트에 수용된 많은 음악가들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옮겨지기 전에 일정한 기간동안 음악활동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제한적인 게토 속에서 이들이 각각 음악에서 정신적 위로를 받았음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포로들이 나치의 정치적 프로파갠더에 이용되고 있었고, 그 목표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아마도 쉽게 꿰뚫어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치음악정책의 성공이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애매 모호함과 이중성으로 희생자들에게 자신들이 이용당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이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모순된 베토벤 음악의 수용 중에 논리적으로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경우는 나치들이 한편에서는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환희의 송가>를 연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과 헝가리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집시들, 정신병자, 허약한 장애자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을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렇게 "모든 사람"의 개념에는 수많은 그룹의 사람들이 제외되고 있었음에도 나치들은 스스로 전혀 모순으로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오용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저항이나 비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최고의 악을 저지르는 무리들이 최고의 선과 휴매니즘를 상징하는 <9번 교향곡>을 자신의 편으로 믿고 활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음악이 모든 오용에 속수무책인 상태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나치들은 베토벤 음악만을 오용한 것이 아니라 재즈음악을 제외한 오락음악 및 민속음악, 행진곡 그리고 현대음악을 제외한 (그리고 유대인이 작곡하지 않은) 모든 예술 음악을 이용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대음악과 재즈음악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모든 음악이 정치적 오용에 노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될 수 있다. 왜 나치들은 현대음악과 재즈음악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이 음악들은 어떤 보호장치를 가지고 있었는가? 끝맺으며 나치시기에 베토벤의 음악은 (다른 고전음악 및 바그너의 음악과 안톤 부르크너의 음악과 함께) 독일인의 우월감을 과시하고, 히틀러의 평화적인 외교관으로 뛰어난 역할을 수행하여, 독일 팽창주의 정책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가해자나 희생자에게 모두 위로를 주는 음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수용을 생각해 보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베토벤 음악을 비롯한 고전음악이 소위 '퇴폐적 음악'인 현대음악을 막는 방패역할도 이미 1920년대 바이마르시기의 국수주의자에게서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의 그로테스크한 베토벤 수용조차도 '나의 베토벤은 너희들의 베토벤과 다르다'라고 한 니체의 말처럼, 수용자의 측면에서만 볼 때 -나치 범죄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나치가 역사와 관련이 없는 일회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의 연속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베토벤 수용을 통해 바라본 나치의 음악정책에서 "세상은 무너져도 예술은 살리라"는 파시즘의 유미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스스로 화가로 자처하던 히틀러는 정치적 집회나 행사를 음악 및 예술의 힘을 빌어 '예술적'으로 연출하는 정치의 심미화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유대인 학살이나 전쟁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심미적 대상으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는 특히 자신의 정적인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정치가로 일컬으면서도 스스로는 항상 "지도자 혹은 예술가"임을 자처하는데, 이것 역시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히틀러가 예술의 순수성과 낭만적 예술관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예술의 정치적 도구화를 추구하였다는 사실에서 순수한 음악관이 지니는 오용 가능성의 함정을 재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어차피 생명력이 약한 현대음악을 그냥 두지 않고 공개적으로 학대하는 나치의 태도에서 그들이 표면적 주장과는 달리 예술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깊이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음악을 정치나 사회와 무관한 것으로, "인간의 말과 세상의 비참함을 피해 안식할 수 있는 우주적 언어"로만 여긴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일이다. 비판적 성찰과 시도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환희에의 송가>는 오늘날에도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by 이 경 분
내용출처 : http://www.um-ak.co.kr/gong/nonmun/keonbun-beeth-nazi.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