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생각하면 눈..

다시 듣지 못할 「정은임의 영화음악」│마음의 사람

리차드 강 2009. 6. 9. 18:30
다시 듣지 못할 「정은임의 영화음악」
2003년 10월 22일 고공 크레인
은임씨, 되게되게 보고싶은거 알아요?
(사진출처 : 백은하기자 개인홈)
월간 『말』 2004년 1월호, "올드 걸 올드보이를 만나다"
이오성 기자 dodash@digitalmal.com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던 정은임 MBC 아나운서가 4일 저녁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고인이 진행했던「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습니다. 고인은 MBC 노동조합 여성부장과 업무혁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방송 현실 개선에도 앞장서 왔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월간 『말』 1월호 문화인물탐험에 실렸던 아래 기사는 고인이 살아 생전에 했던 마지막 인터뷰입니다.
올드 걸, 올드 보이를 만나다
글 이오성 기자 사진 허태주 기자
지난 12월 5일 저녁,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2003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의 사회를 보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한 여성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정은임 누나다!"
삼십대 중반은 돼보이는 영화인의 입에서 터진 "누나" 소리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이 정은임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정은임(35). 1992년 11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매일 새벽 1시면 대중들 앞에 목소리를 드러낸 이래 그와 그의 방송은 하나의 "물결"이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 위주의 영화 소개로 일관하던 당시의 영화음악 방송 풍토에서 FM 영화음악은 날카로운 사회비판, 새로운 영화읽기로 1990년대 문화빅뱅의 시대를 진보적으로 지킨 상징이었다.
영화 「파업전야」가 특집으로 편성되는가 하면, 「인터내셔널」가 공중파를 타고 흘러나와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고정 패널로 출연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정은임씨의 대화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진보적 영화읽기"의 텍스트가 되어 회자되곤 했다. "정영음"이란 고유명사로 불리우기도 했던 이 방송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고 정은임은 그 안식처를 지키는 누이요, 연인이었다.
그가 마지막 방송을 진행하던 날 어느 중학생은 수학여행길에까지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가 여관방에서 들으며 눈물지었다. 그날 방송에서 정은임은 "꽃 지는 날 만났다가 꽃 피는 날 헤어진다"며 이별의 회한을 달랬다. 1995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달갑지만은 않았던 방송복귀
그리고 8년 6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20일. 다시 「정은임의 영화음악」(MBC FM)이 돌아왔다. 매일 새벽 3시부터 4시, 그의 말처럼 "청취율의 사각지대"인 탓에 신경 쓸 것 없어 더욱 편한 심야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겨울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난 그에게 던진 첫 마디는 "꽃 피는 날 떠났다가 꽃 지는 날 돌아온 소감을 말해달라"는 말이었다. 감개무량의 감회를 기다렸던 기자의 기대와 달리 그는 "영화음악을 별로 맡고 싶지 않았다"고 답했다. 의외였다.
"걱정되는 일이 많아서 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면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MBC에서 없애려고 했거든요. 지금 영화음악이라는 게 독자적인 무엇이 있는 게 아니고, 이런저런 음악을 삽입하는 수준이잖아요. 전세계적으로도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남아 있는 곳이 몇 곳 안 돼요. 그걸 몇몇 피디가 몸으로 막아내서 그나마 버텨왔죠."
걱정되는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8년 전 그가 영화음악 진행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애청자들이 "정은임 복귀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나선 것이다. 최초의 대중매체 소비자운동인 셈이었다. 이들은 정영음의 사회비판적 내용과 진행자의 적극적인 노조활동 때문에 방송사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와 중도하차하게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해 왔지만, 당시 입사 4년차의 방송 노동자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쏟아졌던 유형무형의 "파장"은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쉽게 가시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와 영화음악을 연관지으며 회사 밖의 사람들과 달리 회사 안에서는 뭐랄까, 당시 그 사건을 해사행위 비슷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어요. 마치 제가 바깥의 사람들을 움직여서 어떻게 한 것처럼 사시를 뜨고 쳐다보는. 제가 결벽증 같은 게 있는 데 그런 오해가 부담스럽고 싫어서 "나는 정당하다, 차라리 방송진행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한번은 영화 관련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하는데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적이 있어요. 내가 하는 어떤 사소한 일조차도 소영웅주의로 바라보는 식이었죠.
사실 2년 전에도 영화음악을 하기로 했다가 회사 내에서 잡음이 일어나 그만둔 적이 있어요. 손석희 부장님이 와서 "네가 영화 일을 안 하는 건 인력낭비다"라며 진행을 제안해서 하기로 했는데 또 주위에서 무슨 끈을 잡았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그때 제가 발끈해서 "나 그렇게 사는 사람 아니다 안 하겠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손석희 부장님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졌어요. 이미 보도자료까지 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시 관 밖으로 나오다
예기치 않은 파장과 그로 인한 부담 속에 영화음악으로의 복귀를 주저할 무렵,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또한 정영음을 사랑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관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니까 더 이상 관 뚜껑을 열지 말아달라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스스로 시체가 됨으로써 정영음을 사랑하던 많은 이들을 결국 "네크로필리아"로 만드는 일이 되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가운데 지난해 정영음과 관련한 다큐를 찍게 됐어요. 거기에 함께 참여하면서 옛날 그 청취자들이 "지금은 어디서 뭘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달라졌지요. 게다가 이제 일 핑계대고 영화는 실컷 볼 수 있겠구나 싶어서 미끼를 덥썩 물었죠."
그렇게 영화음악실로 복귀한 지 2개월여. 11년 전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터. 그에겐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니 어쩌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디오가 굉장히 어려졌어요. 가끔씩 무슨 이야기만 하면 "너무 이념적이지 않아요? 요즘 애들은 듣기 싫어해요" 이런 이야기들이 나와요. 무조건 청취자들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것 같은데 라디오는 솔직하잖아요. 요즘 다른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얼마나 사적인 이야기나 농담 따먹기 같은 멘트를 많이 하나요? 그런데 왜 제 생각을 드러내는 건 안돼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제 일상 중의 하나거든요. 세상이 얼마나 모순적인데, 방송에선 여전히 예쁜 말만 골라서 해요. 그리고 우리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굉장히 즐기지요."
정은임은 가령 창사특집방송이나 불우이웃돕기 같은 코너에 아나운서들이 차출되어 나눔의 정을 호소하고 돈을 모으는 일을 동료들끼리는 "앵벌이 뛴다"라고 표현한다며 종국에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방송의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과거의 정영음이 그랬듯 방송과 사회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그의 목소리도 함께 떨리곤 한다. 복귀한 뒤 두 번째 방송을 하던 날의 오프닝 멘트를 듣고 기자는 가슴이 떨렸다.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고공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씨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는 스스로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겨우 매달린 기분으로"청취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최신유행의 피곤한 수다로 점철되는 FM 방송에서는 물론, 여느 개혁적이라는 매체에서도 이처럼 애틋한 멘트는 듣기 힘들다. 단순히 싸구려 감수성으로 포장할 수 있는 깊이가 아닌 탓이다. 적지 않은 양의 방송 멘트를 써내려가는 일도 때때로 그의 몫이다. 그런 만큼 그에 따른 부담도 함께 돌아온다.
노동자, 그리고 8학군 기자들
"오늘은 이 이야기 안 하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힐 것 같다는 날은 꼭 직접 써요. 영화도 시선이 다르면 달리 보이듯이 어차피 방송을 진행하는 제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굉장히 비난 많이 받았어요. 나더러 노동자에 대해 뭘 아느냐. 육체노동자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뭘 아느냐고 이야기하더군요. 거기에 방송이나 언론의 허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이 세상은 마이크나 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거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SF 영화 같은 세상 아닌가요. 모든 것이 나의 물적 좌표에 따라 바둑판처럼 이미 짜여진 세상. 너는 중산층이고, 한 달에 얼마 버니까 얼마 버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하라는 거죠.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손배가압류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보면 괴롭고, 고민되고 그런 걸 이야기하고 다른 세상을 꿈 꿀 수 있는 거잖아요.
난 비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할 수 없나요? 왜 "8학군 기자들"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방송국에도 정말 8학군 출신 기자들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점점 뉴스에서도 시선이 한쪽으로만 흐르게 돼요. 노동자, 농민 이야기는 그들의 생리나 환경과 맞지 않아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눈도 돌리지 않고. 말은 심각하지만, 그게 일상으로 돌아가면 전혀 심각한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옆에서 투명인간화되어 버리는 청소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인데."
 
MBC 입사와 관련해 정은임씨에게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그가 입사했던 1992년은 MBC가 방송민주화를 내걸고 한창 파업 중이던 시기였다. 수습사원들에게 예의 노조불가입 각서가 강요됐고, 그는 입사동기 중 유일하게 방송사 간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파업에 참여한 "강성"노동자였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네 살배기 아이의 엄마이자 노조의 간부(여성부장)로 재임 중인 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직장 탁아소를 설립하는 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그가 관련 법률까지 직접 챙기며 일을 벌이자 주변에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MBC 쯤 되는 거대 방송사조차 그와 같은 악바리가 나서지 않는 한 여느 직장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MBC에서 그를 만난 날도 저녁에 노조회의가 잡혀 있다며 굵은 서류뭉치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행복한 영화 읽기
1998년에 그는 방송활동을 잠시 접고, 미국으로 영화공부를 떠났다. 그가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제목은 "한국의 영화마니아". 1990년대 초반 정영음을 통해 일군의 영화마니아를 배출했던 당사자이기도 한 그에게 한국 영화와 영화마니아들의 모습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일단 영화판이 엄청나게 커졌죠. 영화라는 것의 속성이 어차피 상업적이에요. 어떻게 보면 상업성 일변도로 가고 있긴 하지만. 대중들은 예전과 크게 차이 나는 건 없다고 봐요. 예전에도 영화를 진지하게 보는 계층이 20%밖에 되지 않았죠. 문제는 커다란 강이 있으면 거기에 맑은 물을 공급하는 지류가 있어야 문화적 자생력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일 테죠. 그런 지류들의 움직임이 아직은 제 기를 못 펴지만 점점 나아지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독립영화 같은 데서 그런 움직임을 발견해요.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수일지라도 이런 게 있다는 걸 알려야죠. 그게 미디어의 기능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엄청난 사명감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자연스레 말하고 전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행복하게 느껴져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게 중요해요. 가령 박찬욱 감독 같은 경우 평론가 시절에 만났을 땐 말 잘 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긴 했지만, 참 빌빌거렸거든요(웃음). 그런데 지금 보면 저렇게 훌륭한 감독님이 돼 있잖아요. 그런 성장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죠."
아닌 게 아니라 정은임씨는 최근 본 영화 중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수작으로 꼽는다.
"「올드보이」를 보면서 송두율 교수를 떠올렸어요. 괴물이란 존재는 어떤 사회나 집단에서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걸 뜻해요. 외적인 측면이 아니라 생각이나 사상 모든 것들이. 영화 마지막을 보면 결국 최민식에게 근친상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것으로 나오거든요. 말하자면 괴물로서의 그 삶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최면을 거는 사람이 어쩌면 감독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감독은 최민식이 괴물인지, 혹은 그를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우리 사회가 괴물 같은 것인지 말이죠.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해석의 시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한 영화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되는 건 당연하고요, 심지어 어떤 관객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마저도 좋게 느껴지더군요."
 
올드 보이와 올드 걸의 연대
이 쯤에서 "올드 보이와 관련해"(?) 정영음과 『말』독자들에게 한 가지 "뉴스"를 알려야겠다. 그건 올 1월부터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도 정영음에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정영음의 방송재개 이후에도 꾸준히 "정성일씨를 출연시켜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정영음의 극성팬들에겐 더없는 희소식일 터. 그런데 정성일씨가 복귀하게 된 과정엔 정은임씨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이를테면, "소녀, 소년을 꼬시다" 정도가 될까.
"복귀하면서 정성일씨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돌아온 답장이 "나는 이제 올드 보이다"라며 고사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무슨 소리냐, 나는 관 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다. 나야말로 "올드 걸" 아니냐고요(웃음). 그렇게 곡절 끝에 일단 한 달 동안만 함께 하기로 했어요."
누군가 한때 "한국에서 영화광의 여러 단계 중 그 첫 번째 단계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때 영화광의 1단계에 진입했던 "올드 보이"들은 영화광의 나머지 단계의 진입에 성공했을까. 그리고 한국영화판을 바꾸기 위한 "올드들의 연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거기까진 알 수 없지만,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겨 "올드 걸"의 반열에 오른 정은임씨의 경우 "열린 영화광"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또 신성한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전엔 바보였어요. 절대적인 진리를 믿었죠.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이나 생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남들을 용납하지 않았아요. 누군가는 그걸 매력이라고 했지만요. 그게 아이를 기르면서 달라졌어요. 과거에 나는 너무 나만의 언어로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의 언어를 하나둘씩 이해해 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세계가 있고, 그런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 하는 게 소중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정말요."
     
2004년 08월 05일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
예전에는 학생이라고 그러면 밥집 아주머니들은 밥을 꾹꾹 눌려 담아 주었다고 그렇니다. 버스 차장도 가끔 차비 안받고 내려주곤 그랬다면서요? 한밤중에 술에 취해서 고성방가할 때, 뭐 이것은 저 학생 때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는 데요, 어른들은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별로 나무라지도 않았습니다. 하숙비가 밀려서 뒷머리를 긁적거릴 때, 그 때 주인 아주머니는 "괜찮아, 걱정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그러셨답니다. 학생이니까, 공부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우리 사는 이곳을 조금은 더 살기 좋게 만들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이해해 주고 대접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우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대학생 많기로 둘째, 세째간다고 하는데요, 입학만 하고 나면 웬만해서는 졸업할 수 있는 풍토때문인지 대학생들의 공부량이 상당히 적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어쩌면 훈훈한 인정으로 학생들을 위해 주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 희미해지는 이유중의 하나도 그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는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만은 아니다, 순수한 열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앞뒤 따져서 기득권만은 놓치지 않으려 한다”, 혹 이렇게 비추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11월 3일 학생의 날이었습니다.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2 ◈
어느 마을에 60년을 함께 살아온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젊었을 때나 노인이 된 지금이나 어떻게나 금술이 좋은지 동네 사람들 모두 부러워했구요. 그런데 어느날 할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줄곧 병 수발을 들던 할아버지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의 기둥을 잃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지요. 하지만 동네사람들은 죽음까지도 함께 한 행복한 부부였다고 부러워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이고요,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한 마을에 이집 저집이 동시에 제사를 맞게 되는 것, 그곳은 슬픔과 공포의 역사일 따름이지요.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던 거창군 신원면, 경찰 총기 난동이 있었던 의령군 궁유면, 4월 3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 제주, 그리고 아직 채 시신도 인양하지 못하고 있는 부안군 위도마을, 모두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곳입니다. 아깝게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명복만 빌 뿐입니다.
(음악)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 중에서 조각배, 오늘 첫 곡이었습니다.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3 ◈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자유의 나라라는 미국 땅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분이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70을 넘긴 할머니이시고 또 한분은 30 대의 건장한 한국 청년입니다. 그런데 이 두분이 미국을 가지 못하는 사연은 좀 다릅니다. 노인은 미국에 살고 있는 외아들의 초청장을 5년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고요, 청년은 무슨 일 때문인지 매번 비자 발급을 거부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듣고 있으면 미국을 못가는 사람들이 바보가 될 정도로 장사꾼도 골프 관광객도 범죄자도 참 모두 잘도 갑니다. 게다가 한 번 가면 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요. 누구를 위한 자유의 나라일까요?
미국간 홍여인이 출석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재판을 마무리한다, 엊그저께 박의원의 재판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홍여인, 글쎄 분명 오긴 올텐데 그 때가 언제쯤일까요?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4 ◈
초코렛과 사탕, 여자친구, 남자친구, 선물. 3월 14일은 그렇게 요란하게 지나갔습니다. 화이트 데이라고요... 그렇다면, 3월 15일 지난 하루를 여러분은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3. 15 마산의거. 4.19 혁명의 씨앗이 된, 우리 역사의 달력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날이죠. 35년전 마산땅을 울린 그 민주의 함성이 이제는 거대한 사탕더미에 깔려서 신음 소리로 변하고, 또 어느새 우리의 달력에서는 사라져 버린 날이 된 것 같네요.
(음악)
영화 베르린덴 중에서
영화 베르린덴 중에서 헨델에 사라방드. 리차드 커프가 지휘하는 뉴욕 필 하모니의 연주였습니다. 오늘 첫곡이었어요.
너무 비장했나요? 오늘 첫곡이... 음, 사실 우리는 역사속에 새겨진 날들을 얘기할 때, 항상 이렇게 마음부터 무거워 지는 것 같애요. 좀 일상적으로 그 날들을 얘기하고, 떠올리고, 그래서 그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미래를 바라보는, 좀 그런 미래지향적인 그런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우리 영화 얘기할때 굉장히 편하고 좋잖아요. 일상 얘기할 때 어제 뭐했니 너 초코렛 받았니 못받았니,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듯이, 우리의 과거들도 편하게 얘기를 할 때, 비로소 그때 우리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참, 사람들이 친하고 편해지면 뭐든지 얘기 할 수 있는 것 같애요. 군산에 HR씨 처럼요, 자, HR 씨 어떤 말씀을 하셨냐 하면요. 요즘에는 영화도 싫어지고, 음악도 싫어져 버렸다고요... 세상이 싫고, 심지어는 저까지 싫다고 그러셨는데, (웃음) 하지만 그래도 속해서 MBC 91.9 Mhz에 주파수를 맞추고, 이 시간이 되면 저와 함께 할 것만은 변하지 않는 생각이라 하셨어요. 그렇다면, 군산의 HR 씨는 저와 친해지실 준비가 되셨네요. 다음에는 꼭 성함을 밝혀주세요. HR 이라고 하지 말고여, 이름을 다 밝혀 주시길 바랍니다.
자, 다음곡 앞으로 편하게 나가볼까요. 강동구 명일동에 최소연양 듣고 계세요? 화곡 7동에 변화진씨도 신청해 주셨구요, 경연씨도 하이텔을 통해 신청해주신 곡입니다. 오랜만에 띄워드리죠? 영화 베니와 준 중에서 프로클리머스의 노랩니다. 아임 고너 비 화이브 헌드레드 마일스.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5 ◈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프랑스가 화장품이 특히 발달한 이유는 미적 감각이 남다른 까닭도 있겠지만 또다른 설이 있습니다. 프랑스 땅 대부분이 석회질이어서 수질이 나쁠 수 밖에 없고 또 물이 좋지 않으니까 피부도 나빠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피부를 보호하려다 보니까 화장품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런 설입니다. 필요에 의한 발달인 셈이죠.
우리한테는 자신보다 더 유명한 소피 마르소를 데리고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했습니다. 고문서 반환이라는 선물을 앞세워서요. 프랑스 대통령 최초의 방한을 환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고문서 반환, 이건 역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이렇게 반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진작 돌려주지 않고 하필 TGV가 선정된 뒤일까요? 이유가 어떻든간에 고문서 반환, 대통령 방한 둘다 환영하면서 함께 온 소피 마르소의 노래 띄워 드리겠습니다.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6 ◈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지하철의 무임 승차, 하루에 몇명일 것 같으세요? 만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올해만 해도 290만명이 무임승차로 적발되었는 데요, 실제로는 그의 세배가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 하지요. 300원이 없어서 그러는 사람들은 별로 없은 것 같아요. 개찰구 위로, 밑으로 넘고 기어나면서 걸리나 안걸리나 내기를 합니다. 적발하는 역무원에게 오히려 큰소리를 치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죠? 남산의 유료 터널을 그냥 통과하는 차량들, 하루에 180대라고 그렇니다. 그냥 도주하는 사람, 100원짜리 대신 10원짜리를 넣는 사람, 심지어는 쇠붙이나 담배 꽁초를 집어 넣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걸려봤자 200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자율에 맡기는 것을 악용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개혁과 도덕성 회복, 위에서 부르짖고 있지만, 여러분 아시죠? 무엇이든지 가장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라는 것이요.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7 ◈
코스모스를 꺾어들며 아이들에게 꽃을 꺾는 것은 나쁘다 하면 아이들은그렇다고 대답한다. 왜 나쁜가는 묻지 않는다. 그걸 다시 꽃병에 슬쩍 꽃아 두며 아이들에게 참 교실이 훤하지? 하면 아이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정말 교실히 훤한가에 대해서 혹은 그 꺾음의 정당성 따위는 묻지 않는다.
콩 싶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고전적인 속담을 섞어 말하면 아이들은 고개 끄덕이며 그렇다 한다. 그런데 요즘은 콩을 심어도 그 가운데 팥이 돋아 나올 수 있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벌써 생물 시간의 돌연변이를 떠올리면 어른들처럼 웃거나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참 재미있는 수업이다. 참 재미없는 수업이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해직 교사인 배창환 시인의 수업이란 시인데요, 이 국어 선생님도 이제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겠죠?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8 ◈
내가 지켜온 가장 오랜 기억은 햇빛에 관한 것이다. 넓다란 신작로에 줄지어 늘어선 포플러 나무들, 그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지던 한낮의 햇빛, 끊어질 듯 말듯 들려 오던 골목길 안의 아이들의 소리, 그 때 나는 세살쯤이었던가, 햇빛이 가져다준 밝은 세상, 세상에 처음으로 홀로 마주하고 있던 그 순간부터 햇빛에 관한 나만의 동경은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이 세살짜리 꼬마가 서른여덟 나이에는 햇빛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 한번 계속 들어 볼까요? 햇빛과도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밝음으로, 또한 그런 감내할 수 있는 우울함으로 그것이 나의 어릴적 소망이었다. 중간쯤에서 와 되돌아본 나의 삶이 내가 소망했던 것과는 이만치나 동떨어진 것이라해도 나는 내 바람을 바꾸지 않겠다. 이제 겨우 세상에 눈뜬 내게 한번쯤의 관내함은 가능하지 않을까? 삶이라는 것이 늘 밝은 것도, 견뎌낼 만큼의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라면 나는 내 절반의 삶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늦깎이 삶에 대한 치열함으로 나는 어릴적 햇빛에 대한 기억에서 얻은 소망을 지켜야 할 것 같다. (음악)
- 풀종다리의 노래 중에서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9 ◈
홍대앞에서 여의도까지 오는 데 2시간 30분이 걸려도 코스를 잘못잡은 자신을 탓하기. 가스가 폭발하더라도 연탄대신 도시가스를 택한 자신을 탓하기. 내가 사는 아파트가 바다 모래로 지어졌다는 것이 밝혀져도 이사 잘못한 자신을 탓하기. 내가 낸 세금이 세도들의 호주머니에 가 있더라도 그 세무소 관할에 살고 있는 자신을 탓하기. 다리가 무너져도, 그래, 체중 많이 나가는 우리가 너무 많이 지나갔어, 이렇게 생각하기.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앞서 말한 행동 강령은 대학민국 국민으로, 서울 시민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철칙이었습니다.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10 ◈
황폐한 육신이 너무 무겁습니다. 계절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빛나던 모든 것들은 나를 떠나갔습니다. 황금빛 기억들이 물결치 듯 푸르른 날, 목이 긴 그리움으로 남겨진 시간들은 까맣 씨앗이 되어 여물어 갈 것입니다.
안녕하세요?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시인 박 권숙 씨의 처녀 시집, 겨울 묵시록 중에서 가을 전묘라는 시였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바깥 세상에서는 생명이 무성하지만 다른 이들의 세상일 뿐, 자신의 뜰은 싸늘할 뿐이라구요. 살아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열심히 시를 써서 생명 확인 작업을 하겠다고요. 왜냐하면 세른 한 살의 시인은 만성 심부전 증으로 일주일에 두번 인공 심장기로 피를 걸려가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 속의 희망은 아름답니다. 마치 가을 햇살처럼요.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32 ◈
1995년 3월 30일 방송 (마지막 방송 하루전)
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럽지 않으랴.
불어 닿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꺾이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사궈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몸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은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짖궂은
이웃들의 비웃음,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려워
산 비야와 바위 너설에서 목 움추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 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33 ◈
1995년 3월 31일 마지막 방송
꽃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지는 날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이별이 아니구요
마당 한 모퉁이에 꽃씨를 뿌립니다
꽃피는 날에서 꽃지는 날까지
마음은 머리 풀어 헤치고 떠다닐 테지요
그대만이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꽃지는 날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요
그대의 뒷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새로 잎피는 길을 갑니다
(음악)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영화 흑인 올훼 중에서 Manha De Carnaval, 카니발의 아침. 오늘 첫 곡으로 띄워 드렸습니다. 꽃 피는 날, 꽃 지는 날이라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구광본 시인의 시 중에서 한 귀절로 오늘 시작했는데요. 꽃 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싯귀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반대네요. 제가 92년 가을에 방송을 시작했으니까 꽃 지는 날 그대와 만났고요. 이제 봄이니까 꽃 피는 날 헤어지는 셈이 되었네요. 오늘 여러분과 만나는 마지막 날인데요. 사실 지난 2주일 동안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동안 소개해 드리지 못한 엽서, 사연들을 어떻게 다 정리해서 소개해 드릴 수는없을까, 사실 그 동안 제가 엽서니 편지니 소개 못드린 것에 대해서 늘 죄송하게 생각한 것 아시죠? 그리고 또 MBC 레코드실에 올라가서 하루에 몇 십장씩 음반을 찾아오곤 했었는데요. 이곡도 들려 드리고 싶고 이곡도 들려 드리고 싶고 참 좋은 데, 끝나기 전에 더 좋은 곡을 한 곡이라도 들려 드리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는데, 참 그게 어떻게 보면 오만했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 다음에도, 내일도 방송은 계속 되고요. 또 좋은 분이 좋은 곡을 들려 드릴테니까요. 자, 다음 곡 띄워 드리겠습니다.많은 분들이 청하신 곡인데요. 제가 방송을 맡은 후에 처음으로 시내에 나가서 구해온 앨범이에요. 제가 갖고 있는 앨범인데. 천장지구 중에서 비안드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짧은 순간의 사랑. (음악-짧은 순간의 사랑) / (CF) / (음악-Midnight Blues) 영화 '날이 새면 언제나'에 삽입된 Midnight Blues. 오늘은 좀 느낌이 다른 곡으로 들어 봤습니다. 쟝끄로드 보렐리가 연주했는데요. 사실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으로 들려 드려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블루스를 좋아하게 만든 곡이었거든요. Midnight Blues. 그뒤에, 이곡을 들은 이후에 블루스,솔,재즈 이렇게 흑인음악에 모두 빠져들게 만든 그런 음악이었는데, 아, 오늘 제가 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죠. 그런데 어떡하죠? 한 시간을 제 얘기로 사실 꾸몄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인사드리면서 그동안 여러분의 이야기만 들어 봤는데 제 영화들, 그러니까 제 인생에 남았던 사연있는 영화들도 한번쯤 소개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은임의 내 인생의 영화 다섯편, 오늘 소개해 드립니다.
오래전 잊혀졌던 사람을 오늘 마음이 추운날 다시 생각한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