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글린카 비올라 소나타 라단조 - Norbert Blume-Olga Tverskaya│국민파

리차드 강 2017. 8. 19. 04:17

Sonata for viola & piano in D minor

글린카 비올라 소나타 라단조

Glinka, Mikhail Ivanovich 1804~1857

1. Allegro Moderato - 2. Larghetto...

 

Norbert Blume, viola - Olga Tverskaya, piano

글린카 실내악곡집.

독특한 편성의 희귀음반으로 클라리넷과 파곳, 피아노를 위한 트리오인 글린카의 '비창'트리오는 우선 그 편성이 대단히 독특하다. 제목에 걸맞게 우울하고 어두운 색조를 지니고 있지만 극단적이지는 않은 것이 목관악기, 특히 원전 목관악기의 음색이 부드러운데다 포르테 피아노 역시 자극적인 울림은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글린카의 비올라 소나타는 연주도 좋지만 녹음이 극히 희귀하다는 점에서도 반가운 음반이다.

     

글린카의 비올라 소나타

글린카의 비올라 소나타는 비록 미완성으로 2악장까지 밖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비올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곡 가운데 한 곡이다. 글린카(Mikhail Glinka, 1804-1857)는 흔히 러시아 국민악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글린카가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도 회상하고 있듯이, 어린 시절 러시아 민요를 편곡한 악단이 자신의 집에 행사가 있을 때 연주한 것을 들은 경험이 그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글린카는 녹턴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존 필드에게도 잠시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필드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제자였던 칼 마이어에게 배우는 한편, 바이올린을 요셉 뵘에게 배웠다. 글린카는 말년에 교회합창곡 작곡을 계기로 유럽의 교회선법에 관심을 갖게 되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856년 베를린에 건너가 글린카에게 올바른 음악이론과 예술적 개념을 심어준 옛 스승 지그프리트 덴(Siegfried Dehn, 1799-1858)을 찾아 과거의 작품들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전에 병을 얻어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이렇듯 탐구열이 깊었던 글린카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케루비니 등 고전파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도, 스스로는 고전적인 형식에 대한 연구를 늘 미흡하게 생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단조는 글린카가 고전파의 작품에 대한 탐구에 열을 올리던 1828년 경에 작곡되었는데, 형식에 대한 탐구에서 잠시 벗어나 여유로운 마음에서 작곡된 것으로 보인다. 어렵지 않게 마음에 와 닿는 주제를 피아노가 먼저 제시하고 곧 이어 비올라가 그 선율을 되받아 연주해가는 1악장은 애틋한 감정으로 충만하다. B flat 장조의 2악장은 어딘지 슈베르트를 연상케하는 아름답고도 따스한 분위기이다. 피아노의 주제를 받아, 비올라가 노래를 하고 피아노가 아름답게 감싸준다. 평온한 정적을 깨는 듯한 피아노의 화음을 신호로 노래는 숨이 가빠지는 듯 애절해진다. 피아노도 더욱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음형으로 고조되어간다. 글린카는 1828년에 이 곡의 1악장만을 완성했고, 2악장은 미완성인 채로 두었다. 2악장은 보리소브스키(Borisovsky)가 완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글린카는 어린이용 음악을 시작으로 하여 나중에는 오페라까지 작곡하는 작곡자로 변신한 작곡자이다. 그가 젊었을 당시 자신의 작품이 음악 학교에서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작곡에 몰두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댄스곡이나, 적은 소품 그리고 변주곡이 주를 이루었으며, 성악곡과 마찬가지로 그 것 들은 당시에 유행하였던 민요나 오페라가 테마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국내의 아마추어 용으로 사용되었다.

글린카는 자신이 작곡한 작품들에 대하여서는 유능한 연주자 이기도 하였다. 어릴 적에 비올라를 배운 적이 있는 그는 이런 면에서 이 비올라 소나타도 마찬가지이다. 이 곡은 1825 년 작곡자로서 초기 시절에 작곡된 것으로 처음에는 Allegro 단 악장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20 대 전반기 작품 중에서는 제일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3 년 후에 절친한 친구와 모스코바에 체류한 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2 악장 Larghetto를 작곡하였다. 그는 러시아 민요 "Sadushka"를 테마로 하여 한개의 악장을 더 작곡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것을 테마로 한 피아노 소품은 만들어졌으나 본 소나타 3 악장의 작곡은 마지막까지 이루지 못하였다.

     
     

Michel Ivonovitch Glinka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는 미첼 이바노비치-글린카는 1804년 6월1일 러시아의 스로렘스크현 노브스파스코에서 태어나 1857년 2월15일 독일의 베르린에서 잠들었다.

글린카의 부친은 부유한 대지주로서 27세 때 벌써 군무에서 벗어나 자기의 토지관리만 하고 있었다. 이러한 집안이었으므로 그린카는 다복한 분위기 속에서 키워졌다. 그가 음악에 흥미를 느낀 것은 열살 때부터이며 이웃에 있던 숙부는 러시아의 자부호만이 자랑하는 특권으로서 사설의 관현악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악단에서 연주하는 러시아 민요를 사랑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연습을 시작했다. 1817년 페텔그라드에 가서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1822년의 여름까지 거기에 있었다.

정규의 학습 외에도 음악은 교회에서 배웠다. 야상곡의 창시자 존-휠드에게 수회의 교육을 받았고 그 후는 독일인 피아니스트 칼-마이야에 사사을 했다. 학교를 나오고 나서 관리가 되도록 하라는 부친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어떠한 종류의 장사도 그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또한 그린카에게는 생활 때문에 취직할 필요성이 없었으므로, 병을 알았던 그는 1823년의 봄에 코카사스지방에 전지 요양을 하게 되어 피아티고르스크에서 온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 치료의 요법은 적합치 않았다. 겨울에 집에 돌아와 매일같이 숙부의 관현악단에 들어가 자연히 관현악을 배우게 되었다. 모찰트, 하이든, 켈비니, 메뉴울 그리고 베토벤의 제2교향곡 같은 것이 연구의 대상이었다. 1824년 5월에 부친의 강압에 못 이겨 그는 수도에 가서 철도성에 들어갔다. 다행이도 그 철도관청의 일은 힘든 것이 아니어서 하루 몇 시간을 일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관들은 그를 음악의 집회에 초대했다. 순식간에 그는 사교계의 한 인물이 되어 무용이나 성악의 공부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히 가곡의 작곡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다작하는 가곡의 작곡가가 되었다. 다산작이라는 의미는 그의 전체작품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600곡이나 쓴 슈벨트에 비교하면 그는 80곡을 쓴데 지나지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손꼽을 만큼 밖에 없다. 그 대다수는 디렛탄트형의 로만스의 견본이다. 1828년의 여름에 철도관청을 그만 두고 이태리어 공부를 시작하여 쓰안포니라는 이태리인으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대위법을 조금 배웠으나 주로 이태리어로 이태리적인 작곡을 했다. 이 이태리에 대한 열이 높아져서 1828년 8월에 네뷔 하상의 공개 세레나테라는 극채색의 형식을 취했다. 그린카도 한패에 끼어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람들이 한척의 배에, 또 다른 한척에는 근위기마연대의 나팔수들이 탔다. 그들 모두 뱃노래나 가극의 합창을 하고 나팔수들이 연주를 했지만 그 중에는 특히 글린카가 작곡한 행진곡이 있어서 후에 그것이 그의 가극의 종곡에 사용했다. 그가 시인 푸슈킨과 친구가 된 것은 이 시대였다.

글린카는 신경통을 고치기 위하여 기후가 따뜻한 지방에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의사가 진단을 내리어 그가 오래 전부터 열망하던 외국행이 실현케 되었다. 1830년 5월에 성악가 이와노프와 동행해서 출발했다. 도렌스탠을 통하여 월초에 미라노에 닿았다. 그린카는 당시 미라노음악원의 수석교수었던 프란체스코-바시리에게 대위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는 곧 싫어져서 그 공부를 집어 치웠다. 미라노에서는 위안거리가 많이 있었으며 여자 친구들도 사귀게 된다. 벨리니와 도닛셋티가 활약하고 있어서 이때의 그린카는 이테리가극에 몹시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곧 이어 그는 말하였다. 자기는 진실한 이태리인이 되어버리지 못할 러시아인임을 확신했다. 회향병에 걸려 그 때문에 잠시 러시아인으로서 작곡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드디어 1833년 7월 영구히 이태리로부터 러시아로 떠났다.

귀국의 도중 수개월간 베르린에 채류했지만 이것은 그린카에게는 중요한 것이며 그의 생애에 새로운 국면을 열개된 계기가 되었다. 29세의 그는 이제 비로소 단기간이기는 하나 진지하게 작곡상의 기법적 제문제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덴한데 작곡의 이론을 배우게 된다. 그린카는 텐하넫 배우면서도 피아노 연탄곡 로서아의 주제에 의거한 카프리치오, D단조교향곡의 두 악장및 그의 가곡중 가장 훌륭한 작품 쥬코프스키의 나무는 속삭인다를 작곡하게 된다.. 베르린에 수개월 채류하는 동안에도 어여쁜 처녀들과 연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이 죽어서 모두 중단하고 귀국을 했던 것이다.

페텔그라드에 돌아온 그는 시인, 평론가인 쥬코프스키를 통하여 푸슈킨과의 고유를 돈독히 했고 로서아문단에 나타난 식성 고오골에도 소개되었다. 그린카는 러시아가극을 쓰고 싶다는 야심을 쥬코프스키에게 이야기 하게 된다. 그래서 제공된 제재가 오늘에 와서는 이반-스자닌(Ivan Sussanin)이라고 개제된 황제께 바친 목슴(A Lie for the Tsar)이다. 즉 농민 이반-스자닌은 163년에 루시아국경에 내습한 폴랜드병의 일당을 미로에 몰아넣으므로서 자기 생명을 희생해서 로마노후 왕조의 태조의 생명을 구했다는 영웅적인 스토리이다. 그린카는 대사가 다 되기도 전에 가곡에 착수했다.

1835년 5월에 글린카는 새로운 연인 마리아-페테로뷔나와 결혼 하였다. 이 신혼생활은 잠시 즐거운 것이었다. 그는 신부를 데리고 노브오스바스코에서 시골에 가느 마차속에서 제3막에 있는 4분지 5박자의 귀여운 혼례합창을 벌써 썼던 것이다. 1836년 2월이 되니 비공식의 연습이 재시되는 등 작곡이 신속히 진행되었다. 그해가 저물 무렵 상연되었을 때 황제에의 충성를 못토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황제에 의하여 쾌히 가납되었다. 황제는 그린카에게 4천루불의 가치있는 아름다운 지환를 선물로 하사했다. 그리고 그린카는 그것을 아내에게 주었다. 그린카의 가곡 중 가장 유명한 한밤중의 예병(Midnight Review)이 작곡된 것도 이 시기 때이다.

이반-스자닌에서 예술적 승리를 얻은 그도 가정생활은 점점 재미없이 되어갔다. 마리아는 남편의 일에 전혀 이해가 없는 낭비가 심했다. 그린카의 풍부한 재원은 아낌없이 흘러나갔다. 쿠쿨닉크의 비극 흘름시키공(Le Prince Kholmsky)에 부대음악을 쓰고 다시 제2의 가극 루쓰란과 류드밀라(Ronsslan et Liudmila)가 진행되고 있을 때 마침내 마리아하고 이별하게 되었다. 이반-스자닌은 러시아적인 제재에 의해서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음악은 다분히 이태리적인 영향으로부터 벗아나지 못했다. 그러나 루쓰란과 류드밀라느 그린카의 천성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다. 루쓰란으 상연 후 그린카는 재차 태만하여져서 외국 여행를 떠났다. 1844년 6월에 파리에 가서 베르리오즈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1년후에는 스페인에 발을 들여 놓고 거기 풍물에 매혹되었다. 판페루나에서 스페인춤을 처음 보았다. 또 파리아드리드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후에리스-카스태일아라는 사내의 키타연주를 즐겨 들었다. 그 때의 선율의 하나인 호타-아리고네자와 그 변주곡에 몹시 흥미를 가지고 9월에 마드리드에 도착직후 그거세 으해서 관현악곡 화려한 기상곡을 썼는데 후에 개재되어 스페인 서곡 제1번이 되었다. 여기서도 그린카는 귀여운 여자를 찾아내어 같이 살았다. 그러나 1847년 5월에 러시아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 러시아세서는 푸슈킨이나 레르모토후도 죽고 뜨르게네프가 엽인일기의 제1권을 출판하였으며 도스또에프스키가 빈곤한 사람들로서 주목을 끌고 있을 때였다. 이것은 문예상의 르네상스를 보여주는 최초기의 증후로서 이어서 60년대에 있어서의 음악의 개화와 정치적 개혁을 초래할 것이었다.

노브오스파스코에의 시골에 있으면서 곧 신경이 어지럽게 되는 그린카는 다시 외국에 갈려고 생각하여 와루샤와까지 와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여 그곳에 주저않고 말았다. 토지의 지사 파스케빗치공으 요구에 응해서 공의 관현악단을 위해 작곡키로 되었다. 그린카는 열을 내어 스페인의 메로디의 선율에 의한 혼성곡을 쓰고 마드리드의 밤, 스페인서곡제2번(Sou venir d’uuenuit d’ete a Madrid)라고 이름 붙였다. 이 악단을 위해서 쓴 또 하나의 곡은 러시아의 2개 선율에 의한 것으로서 그것이 그린카의 전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카마린스카야(Kamarinskaya)의 환상곡으로 되었다.

1851년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기 때문에 일단 귀국했으나 곧 다시 베르린으로부터 파리까지 여행하였다. 베르린에서는 마이엘벨과 교류하거나 구사 텐을 방문하곤 했다. 파리에서 놀고 있는 동안에 크리미야 전쟁이 시작되었기에 귀국하였다. 그의 누이동생 류도미라-체스타코봐의 집에서 조용히 지내고 여기서 자기의 회상록의 집필에 착수했다. 1855년 바하의 B단조미사곡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그린카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되어 교회 음악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 때문에 1856년 5월에 다시금 베르린의 덴을 방문하여 고전 종교음악이나 바하를 연구했다. 그린카 자신은 두개의 둔주곡을 썼다. 1857년 1월 21일 부로이센 왕의 궁정 음악장이었던 마이엘벨의 초청에 의해서 음악회에 갔었다. 그러나 무더웠던 궁정을 나와서 차가운 밤의 공기를 마신 것이 탈이 되어 독감에 걸렸다. 그대로 병사의 사람이 되어 2월15일 아침 평화로운 가운데 급사하고 말았다. 실로 그린카의 생활은 방랑적이었으며 로멘스에 가득찬 것이었다. 그는 한 때 이태리 음악에 도취되어 모든 것을 이태리 풍으로만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타고난 스리브적인 그는 끝내 러시아인이었다. 조국 러시아의 음악을 새로운 현대적인 음악으로 이끌어 내는 데 큰 선구가적인 역할을 한 사람인 것이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