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거장, 천상의 현을 울리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별세

리차드 강 2007. 4. 27. 14:46

거장, 천상의 현을 울리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별세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1번 G단조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Cello Suite No.1 i-Prelude - Rostropovich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지난해 말 간 질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나 이날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그는 지난달 27일 80세 생일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달 들어 건강이 악화됐다.

1927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났으며 모스크바 국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뒤 1945년 소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황금상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를 사사했으며 리히테르(피아노)의 반주로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에밀 길렐스(피아노)와 레오니트 코간(바이올린)과 트리오로도 활동했다.

1974년에는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개 지지했다가 추방당했다. 공민권을 박탈당한 뒤 서방에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만들었다. 첼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 연주를 선보인 그를 위해 작곡가들은 앞 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생전에 세계 초연한 작품은 240곡이 넘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벽돌 더미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1990년 소련 체제 붕괴 후 복권된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1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첫 무대에서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은 세기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슬라바’(영광)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므스티슬라프’를 짧게 줄인 이 애칭은 최고 연주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4, 5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김치와 갈비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서 나를 부르면 언제든지 가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aphy@donga.com

`돌을 맞더라도 연주는 마쳐야` 박해 속에서도 첼로 켜시더니… [중앙일보]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타계 제자 장한나가 띄우는 편지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의 타계 소식을 프랑스 파리에서 들은 첼리스트 장한나(25)씨가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장씨는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로 대상을 수상한 후 그를 사사했고, 이는 세계적인 연주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로스트로포비치와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가깝게 지내온 장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1994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 12살이던 제가 1차 예선의 연주를 마치고 무대 뒤로 들어왔을 때 선생님이 거기에 계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의 가슴높이밖에 오지 않는 작은 한국 소녀를 말없이 꼭 끌어안아 주셨죠. 첼리스트에게 신과 같은 존재인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한나시카'라는 러시아식 애칭으로 제 이름을 바꿔 부르시며 예뻐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습니다. 힘들게 음악을 하신 분이라 마음이 더 아픕니다. 고국 러시아의 정치 상황은 음악가를 내버려두지 않았죠. 구소련 시대 대표적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개적으로 옹호해 파리로 추방당하신 선생님은 저에게 "연주자의 길을 걷다 보면 비방과 방해에 시달릴 수 있지만 음악을 놓으면 안 된다"고 일러 주셨잖아요. "연주자는 돌을 맞아가면서도 연주를 끝까지 마쳐야 한다"는 말은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박해를 받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 들으신 말씀이셨죠.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89년 11월 12일 로스트로포비치는 현장으로 달려가 즉석연주를 했다. 연주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인류애와 역사적 사명감이 담긴 이 모습은 전세계에 TV 생중계를 통해 전해졌다. [로이터=뉴시스]

첼로 곡만 120여곡을 초연하시고 지휘자로도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모습은 제게 큰 자극이 됐습니다. 워싱턴, 모스크바, 뉴욕으로 제가 레슨을 다닐 때면 늘 같은 곡을 매번 다르게 연주하도록 주문하곤 하셨죠. 손가락 번호도 바꾸고, 템포도 다르게 해보고. 어린 저에겐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연습해보면 네가 어떤 음악을 원하는지 알게 될 거다"라는 말씀은 적중했습니다. 저의 첫 데뷔 앨범을 선생님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내고 저는 부쩍 성장했습니다.

선생님께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제가 14살 때, 선생님은 "오늘이 마지막 레슨"이라고 하시며 "이제 음악의 열쇠를 줬으니 네가 문을 열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제가 선생님 계신 곳을 쫓아가 "당장 첼로 들고 가겠다"고 해도 받아주시지 않으셨죠. "스승 없이 음악을 해야 진짜 성숙할 수 있다. 이제 가르칠 것을 다 가르쳤다"고 하시면서요. 하지만 그 후에도 제 연주에 와서 들어주시고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초콜릿도 주셨죠.

4년 전 뉴욕에서 뵈었을 때는 저를 번쩍 드시면서 "너무 가볍다. 밥 많이 먹어야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지난달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이 베푼 생일잔치에 참석하신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야위신 모습을 처음 본 저는 한동안 마음이 아팠답니다.

선생님, 지금 저는 선생님과 처음 만났던 파리에 있습니다. 유럽 연주를 막 마쳤습니다. 장례식에라도 참석하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네요. 다음 무대에 설 때는 선생님 생각만 날 것 같습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 로스트로포비치 = 1927년 구소련 연방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난 그는 45년 소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황 금상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소련의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최고의 음악가들을 사사했다. 간장 질환으로 러시아 남부 종양전문센터서 입원치료 도중 27일 타계했다. 옐친,체홉 등이 묻힌 모스크바 시내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LudWig van Beethoven Cellosonate g-Moll op.5/2

 

     

로스트로포비치 (1927 3. 27 ~ 2007. 4. 27)

로스트로포비치라는 이름은 첼리스트의 이름을 뒤지다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한다. 므스티슬라브와 레오폴드(1892∼1942) 부자가 그들이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카잘스의 제자였다. 그리고 므스티슬라브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핏줄 탓인지 환경 탓인지 므스티슬라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4세때 폴카를 작곡해 스스로 연주했다. 5세 때는 집안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레오폴드는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에서 연주하며 그네신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므스티슬라브도 그곳에서 코졸루포프에게 배우기시작했다. 10세 때인 37년, 레오폴드와 오케스트라 연주여행에 동행했던 그는 최초로 협연의 기회를 잡았다.

1941년, 14세의 나이로 첼로와 피아노과를 동시에 졸업한 그는 이듬해 아버지 레오폴드를 잃었다. 당시 레오폴드의 나이 50세에 불과했다. 므스티슬라브는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첼로 클래스를 물려받았다. 그는 10대 후반에 이미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 등을 스승이자 동료로 두었다. 모스크바 필과 연주 여행을 다녔고, 10년 이상위인 리히테르를 독주회 반주자로 두었으며, 길렐스·코간과 피아노 트리오 활동도 했다. 1945년 모스크바 콩쿠르를 시작으로 프라하,바르샤바, 부다페스트에서 콩쿠르를 석권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로스트로포비치라 하면 사람들은 모두 레오폴드를 떠올리기보다 므스티슬라브를 떠올렸다. 카잘스에 비한다면 로스트로포비치의 젊은,아니 어린 시절은 ‘화려한 인생’ 그 자체였다.

그가 어린 시절 피아노를 병행해 공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그는 훗날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의 독창회반주를 암보로 연주할 정도로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는 지휘자로서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처음 첼로의 길을 걸을 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협주곡에서 독주악기로 오케스트라와대적할 때, 그의 연주는 특히 빛을 발한다. 이는 첼로로써 피아노가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딱딱하고 금속적인 소리에서 돌변해 꿈꾸듯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어떠한 어려운 기교도 악상에 맞게 소화해 내는 연주.아버지 레오폴드를 통해 내려온 카잘스의 주법이 므스티슬라브에 이르러, 약 50년 만에 다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연주는 초인적이다’ ‘그는 첼리스트가 아니다. 자연현상이다’ 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작곡가는 그에게 앞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그의 레퍼토리가 현대곡에 폭넓게 포진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거꾸로 그의 폭넓은 표현력과 강렬한 연주 효과는 작곡가들에게 첼로 협주곡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현대곡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인적인 연주만큼 그의레퍼토리도 초인적으로 넓다.

1956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된 그는 구소련에서 인권운동을 펼치던 노벨상 수상작가 솔제니친을 옹호한 죄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다. 이 또한 정치와는 무관한 인류애의 발로였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앞에서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전혀 쇼나 이벤트로 비치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이전에도 그의 연주 모습을 보면 협연석에 앉아 오케스트라를 향해 몸으로 얘기하는 듯한 동작을 자주 취하곤 했다. 몸속에 정열이 끓어오르던 그는 지휘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탈 도라티의 후임으로 1977년부터 워싱턴 내셔널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그는 이후로도 첼로와 지휘를 병행하며 양쪽 어느 하나 허술함이 없었다. 그가 지휘한 텔덱 레이블의 음반중에는 이미 수작으로 거론되는 음반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나 바이올리니스트들과의 협연 음반들이 좋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아끼고 아낀 끝에 92년에 녹음(EMI)했다. 새로운 해석을 많이 시도해 ‘장고 끝에 악수’라는 평을 듣기도했지만 아직 평가를 내리기는 성급하지 않나 싶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