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 엘튼 존은 절정의 인기와 더불어 엄청난 돈을 벌게 된다. 그러나 앨범-투어-앨범-투어로 이어지는 생활에 지치기 시작하고 코카인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1976년 롤링 스톤즈 기자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밝힌다. 사실 엘튼 존은 양성애자가 아니었는데, 동성애자라고 하는 것보다 충격을 덜 줄까 싶어서 그랬다.
이 커밍 아웃 비슷한 커밍 아웃으로 언론은 물론 팬들까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결과는 앨범 판매량으로 이어져, 그 후 발표한 “Blue Moves”가 차트 3위에 그치면서 앨범 차트 1위 행진이 끝난다. 이를 시작으로 엘튼 존의 커리어는 내리막 길로 접어든다.
80년대 펑크와 디스코의 인기로 엘튼 존의 차트 순위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공연에는 관중을 몰고 다니는 스타였다. 하지만 엘튼 존의 문제는 음악이 아니라 사생활에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코카인 중독과 알콜 중독은 갈수록 심해져서 공연때 외에는 늘 취해있었고, 건강도 나빠졌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엘튼 존은 결혼을 한다고 발표합니다. 신부가 될 스튜디오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르네드 브로어라는 여자는… 여자였습니다. 84년 발렌타인 데이에 호주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엘튼 존은 결혼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술과 마약, 우울증에 괴로워했고, 87년엔 타블로이드 신문 “The Sun”이 엘튼 존에 관한 섹스, 마약 스캔들을 계속해서 싣기 시작한다. 기사 내용은 점점 수위가 높아져가고 결국 엘튼 존은 신문사를 고소하게 된다. 88년 허위 기사로 판명났지만, 그 사이 부인과는 소원해졌고 오랜 별거 끝에 88년 10월 이혼하게 된다.
계속 악화되기만 하던 엘튼 존의 삶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은 Ryan White라는 에이즈에 걸린 소년이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용기있는 모습의 라이언 화이트와 그 어머니에게 감명받았던 엘튼 존은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90년 7월 재활 센터에 들어갔고, 그 이후로 마약과 술을 끊는다.
에이즈로 주변 사람들을 많이 잃었던 엘튼 존은 자신이라도 뭔가 해야겠다 결심하고 92년 Elton John AIDS Foundation을 설립한다. 이 단체는 2008년까지 1억 5천만불 이상을 모금하면서 에이즈 환자들을 돕고 있다.
92년 “The one”이 16년만에 차트 탑텐에 진입하고, 94년엔 디즈니 만화영화 “The Lion King”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면서 아카데미 주제가상도 수상한다. 93년엔 여생의 파트너가 될(아마도) 데이빗 퍼니쉬를 만난다. 이 남자는… 남자다. 97년 절친한 친구였던 지아니 베르사체와 다이아나 전 왕세자비의 죽음으로 슬픔을 겪기도 했지만, 새로운 엘튼 존의 90년대는 순조롭게 지나갔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들어서면서 엘튼 존은 스튜디오 앨범과 더불어, 드림웍스의 만화 “The Road To El Dorado”나 뮤지컬 “AIDA”, “Lestat”, “Billy Elliot”등 뮤지컬 음악쪽으로도 왕성한 활동한다. 2004년 라스베가스의 “Red Piano”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지금까지 200회 이상 공연되면서 유럽까지도 옮겨 공연중이다. Red Piano, 솔로, 밴드 투어등 다양한 형식의 공연으로 계속해서 팬들을 찾아가고 있다.
2007년 환갑을 맞은 엘튼 존은 그 어느때보다 행복하다고 합니다.
출처 : 엘튼존 한국펜 페이쥐 (2008년 10월 nalg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