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송

Goodbye Yellow Brick Road - Elton John│1973

리차드 강 2009. 10. 14. 17:35

Goodbye Yellow Brick Road - Elton John

Goodbye Yellow Brick Road (DJM UK 1973)

Sir Elton Hercules John (25 March 1947- )

B1. Goodbye Yellow Brick Road

Arranged By [Orchestral Arrangement] - Del Newman
Backing Vocals - Dee Murray , Nigel Olsson
Guitar [Leslie], Backing Vocals - Davey Johnstone
Piano - Elton John

When are you gonna come down? When are you going to land? I should have stayed on the farm I should have listened to my old man You know you can't hold me forever I didn't sign up with you I'm not a present for your friends to open This boy's too young to be singing the blues

So goodbye yellow brick road Where the dogs society howl You can't plant me in your penthouse I'm going back to my plough Back to the howling old owl in the woods Hunting the horny back toad Oh I've finally decided my future lies Beyond the yellow brick road

What do you think you'll do then I bet they'll shoot down your plane It'll take you a couple of vodka and tonics To set you on your feet again Maybe you'll get a replacement There's plenty like me to be found

Mongrels who ain't got a penny Sniffing for titbits like you on the ground

언제 내려 올거니 언제나 돌아올거니 농장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날 영원히 붙잡아 둘수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당신과 계약을 했던 것도 아니고 난 아버지 친구들에게 자랑할 선물같은 존재가 아니에요 슬픈 노래를 부르기엔 난 너무나 어려요

노란 벽돌길이여 안녕 개 같은 족속들이 울부짖는 곳 날 건물 속에다 꼼짝 못하게 심어둘순 없어요 쟁기에게로 돌아가겠어요 숲속에서 울어대는 올빼미에게로 등이 딱딱한 두꺼비도 잡으러 가야지 마침내 알았어요 나의 미래는 노란 벽돌길 저편에 있다는걸

그땐 당신은 무얼 할건가요? 당신의 비행기는 맥없이 추락하고 말걸요 보드카나 토닉 몇잔이면 다시 일어서는데는 문제없을거에요 아마도 날 대신할 사람을 찾을수 있을거에요 나 같은 놈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니까

돈 한푼없이 음식 부스러기를 찾아
바닥을 킁킁대는 잡종개 같은 존재들을
.

 

 

Sir Elton Hercules John, (born Reginald Kenneth Dwight; 25 March 1947 - )

엘튼 존엘튼 존은 1947년 3월 25일 런던 북서쪽 미들섹스의 피너에서 스탠리와 쉴라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은 Reginald Kenneth Dwight 였다.

아버지는 트럼펫 연주자였고, 어머니와 할머니도 음악을 좋아하던 집안 분위기에서 서너살때부터 피아노를 치며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7살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고 11살에 영국 왕립 음악원에 들어가 클래식 음악가의 길로 들어설 준비를 한다. 하지만 엄마가 즐겨듣던 락앤롤 음악을 접한 후 대중 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1961년 Bluesology의 키보드 연주자로 밴드 활동을 시작하고 졸업을 얼마 앞두고 학교를 그만둔다. 공군 출신이던 엄한 아버지와 가정 주부였던 어머니는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데다 아들의 진로에 대해서도 늘 다투었다. 그러다 결국 1962년 부모가 이혼한다.

다른 가수들의 밴드역이나 캬바레등에서 연주하는데 지친 레지날드군은 내 평생 키보드 연주자로 살진 않으리라며 다른 일들을 물색하다 작곡가를 해야겠다고 결정한다. 1967년 Liberty Records의 참신한 인재 구함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그런데 엘튼 존이 작사는 못 한다고하자 Ray Williams(초기 엘튼 존의 매니저를 맡게되는)는 나는 작사는 좀 하는데라고 찾아왔던 17살 소년을 소개해준다. 그렇게 엘튼 존은 평생의 음악 파트너이자 둘도 없는 친구가 될 Bernie Taupin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레지널드 드와이트가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브루솔로지의 섹스폰 연주자였던 Elton Dean과 보컬 John Baldry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지은 Elton John이란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처음엔 우편으로 가사를 주고 받으며 작업을 했으나, 버니 토핀이 엘튼 존의 집으로 옮겨오면서 두 사람은 엘튼 존의 어머니와 새 아버지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함께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Dick James의 DJM Records에서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써서 주는 작사/작곡팀으로 일했으나, 써준 곡들마다 반응이 시덥잖았다. 그래서 엘튼 존은 솔로 가수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기 노래를 불러줄 가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앨범을 내게 된다.

1969년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첫 앨범 EMpty Sky를 발표하지만, 평은 좋았으니 앨범 판매는 저조했다. 1970년 4월 프로듀서 Gus Dudgeon과 Paul Buckmaster의 편곡의 도움을 받아 만든 앨범 “Elton John”을 발표한다. 그리고 8월 드럼 Nigel Olsson, 베이스 Dee Murray와 LA “Troubadour” 클럽에서 가진 첫번째 미국 공연이 대박 호평을 받으면서 엘튼 존의 이름이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71년 1월 싱글 “your Song”이 미국 차트 8위에 오르는 히트를 기록한다. 이때부터 팝스타 엘튼 존의 역사가 시작된다. “Honky Château”부터 “Rock of the Westies”까지 7장 앨범이 연속으로 미국 차트 1위에 오르는 대히트를 기록한다. 특히 “Captain Fantastic and Brown Dirty Cowboy”는 발매 첫주에 차트 1위에 오른 첫 앨범이기도한다.

 

Goodbye Yellow Brick Road (Single 1973)

Elton John

A. Goodbye Yellow Brick Road

 
     
   

Elton John

 

 

70년대 중반 엘튼 존은 절정의 인기와 더불어 엄청난 돈을 벌게 된다. 그러나 앨범-투어-앨범-투어로 이어지는 생활에 지치기 시작하고 코카인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1976년 롤링 스톤즈 기자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밝힌다. 사실 엘튼 존은 양성애자가 아니었는데, 동성애자라고 하는 것보다 충격을 덜 줄까 싶어서 그랬다.

이 커밍 아웃 비슷한 커밍 아웃으로 언론은 물론 팬들까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결과는 앨범 판매량으로 이어져, 그 후 발표한 “Blue Moves”가 차트 3위에 그치면서 앨범 차트 1위 행진이 끝난다. 이를 시작으로 엘튼 존의 커리어는 내리막 길로 접어든다.

80년대 펑크와 디스코의 인기로 엘튼 존의 차트 순위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공연에는 관중을 몰고 다니는 스타였다. 하지만 엘튼 존의 문제는 음악이 아니라 사생활에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코카인 중독과 알콜 중독은 갈수록 심해져서 공연때 외에는 늘 취해있었고, 건강도 나빠졌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엘튼 존은 결혼을 한다고 발표합니다. 신부가 될 스튜디오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르네드 브로어라는 여자는… 여자였습니다. 84년 발렌타인 데이에 호주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엘튼 존은 결혼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술과 마약, 우울증에 괴로워했고, 87년엔 타블로이드 신문 “The Sun”이 엘튼 존에 관한 섹스, 마약 스캔들을 계속해서 싣기 시작한다. 기사 내용은 점점 수위가 높아져가고 결국 엘튼 존은 신문사를 고소하게 된다. 88년 허위 기사로 판명났지만, 그 사이 부인과는 소원해졌고 오랜 별거 끝에 88년 10월 이혼하게 된다.

계속 악화되기만 하던 엘튼 존의 삶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은 Ryan White라는 에이즈에 걸린 소년이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용기있는 모습의 라이언 화이트와 그 어머니에게 감명받았던 엘튼 존은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90년 7월 재활 센터에 들어갔고, 그 이후로 마약과 술을 끊는다.

에이즈로 주변 사람들을 많이 잃었던 엘튼 존은 자신이라도 뭔가 해야겠다 결심하고 92년 Elton John AIDS Foundation을 설립한다. 이 단체는 2008년까지 1억 5천만불 이상을 모금하면서 에이즈 환자들을 돕고 있다.

92년 “The one”이 16년만에 차트 탑텐에 진입하고, 94년엔 디즈니 만화영화 “The Lion King”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면서 아카데미 주제가상도 수상한다. 93년엔 여생의 파트너가 될(아마도) 데이빗 퍼니쉬를 만난다. 이 남자는… 남자다. 97년 절친한 친구였던 지아니 베르사체와 다이아나 전 왕세자비의 죽음으로 슬픔을 겪기도 했지만, 새로운 엘튼 존의 90년대는 순조롭게 지나갔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들어서면서 엘튼 존은 스튜디오 앨범과 더불어, 드림웍스의 만화 “The Road To El Dorado”나 뮤지컬 “AIDA”, “Lestat”, “Billy Elliot”등 뮤지컬 음악쪽으로도 왕성한 활동한다. 2004년 라스베가스의 “Red Piano”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지금까지 200회 이상 공연되면서 유럽까지도 옮겨 공연중이다. Red Piano, 솔로, 밴드 투어등 다양한 형식의 공연으로 계속해서 팬들을 찾아가고 있다.

2007년 환갑을 맞은 엘튼 존은 그 어느때보다 행복하다고 합니다.

출처 : 엘튼존 한국펜 페이쥐 (2008년 10월 nalgom)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